저는 등에 대한 예민함을 가지고 있는 부류이지요. 등을 보이는 것을 어려워해서, 좀처럼 먼저 등을 보이지 않으려고 해요. 반면, 헤어질 때 타인의 등을 보는 습관이 있어요. 앞모습에서 본 느낌과 같은 등도 있지만 정반대의 느낌을 받을 때도 있어요. 살아오면서 ‘나는 등을 믿어’라는 혼잣말을 자주 했지요. 무방비의 뒷모습에 민낯이 들어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거예요. 이것은 제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저는 볼 수 없는 제 등을 복기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들지요.

산책을 하는 사이는 ‘느린 걸음으로 함께 걷고 싶어. 바라보는 방향이 잘 맞아’를 의미하지요. 문제는 어찌 보면 사소한, 또 어찌 보면 결정적이 될 수도 있는 곳에서 일어났지요. A는 타인의 뒷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B는 기분이 울적해졌지요. A는 자연스럽게 걸음이 느려졌고 B는 걸음을 재촉하게 되었지요. 이런 순간이 잠깐이었으면 별일 아니었을 텐데, 산책이란 이런 시간의 지속이지요. 그러므로 함께 산책하고 싶은 사이임을 상기시켜도 둘은 점점 멀어지지요. 하여간 느림보들의 등짝이 문제라니까, 둘은 다시 산책길에 나서겠지만 다른 시간에 다른 열쇠로 다른 현관문을 열게 되는 실패를 거듭하겠지요.

이해와 소통은 다르지요. 이해는 상황이 지나간 뒤 서로의 관점에 맞추려고 애쓰는 이성적 시도이고, 소통은 동시에 같은 시간의 같은 열쇠로 같은 문을 여는 것이지요. 이해와 소통이 섞여 관계가 직조되는 것이지만, 이해만 점점 커진다면 그 산책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런 계속되는 뒤척임 속에서도 결국에는, 내 등부터 살펴보자, 늘 이르는 결말이지요.

이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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