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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없는 수강신청 전쟁에 뿔난 대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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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없는 수강신청 전쟁에 뿔난 대학생들

입력
2018.03.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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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마지막 학기 생입니다. 미디어심리학 수업 버리실 분, 원하시는 만큼 사례 할게요 ㅠㅠ.”

서울 A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2학기에 재학 중인 강모씨는 이번 학기만 마치면 졸업이다. 전공 학점 3학점만 채우면 되는데 전공 과목인 미디어심리학 수강 신청에 실패했다. 강씨는 담당 교수에게 추가 수강이 가능한지 문의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미 다른 전공 수업들은 수강 인원이 꽉 찼기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었다. 전공 3학점을 채우기 위해 한 학기 더 학교를 다니는 방법도 있지만, 60만원에 달하는 등록금을 추가로 내야 한다. 강씨는 고민 끝에 학교 커뮤니티에서 미디어심리학 수강 신청에 성공한 학생으로부터 강의를 구매하기로 했다. 일정 금액을 해당 학생에게 지불한 뒤 서로 시간을 정해놓고 상대 학생이 수강신청을 취소하면, 그 자리에 잽싸게 들어가는 것이다.

#서울 B대 이모씨는 매 학기 수강 신청일이면 새벽 일찍 학교에 간다. 학교 컴퓨터는 수강 신청 서버 접속이 상대적으로 빠르기 때문이다. 지난 학기 그는 원하는 과목의 수강신청에 실패해 ‘헬게이트’로 불리는 과목들을 몰아 들어야 했다. ‘헬게이트’ 과목은 과제와 시험이 어렵고 많아 지옥 같은 수업을 말한다. 덕분에 대학 입학 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 이씨는 이번 학기에도 수강 신청에 실패하고 말았다. 심각하게 휴학을 검토했던 그는 간신히 수강신청 정정 기간에 해당 과목 신청에 성공했다.

대학생들의 수강신청 전쟁은 어제 오늘의 풍경이 아니다. 학생들의 환호와 탄식을 가르는 건 찰나의 순간. ‘누구의 손가락 반응 속도가 좀 더 빠르냐’로 결정된다. 손가락 전쟁이 끝나면 다음 단계는 강의를 사고 파는 ‘강의 거래’다.

수강신청 기간 대학 커뮤니티에는 “OO수업 버리실 분?”, ”OO 화 3교시와 수 5교시 바꾸실 분?” 같은 게시글들이 몇 분 단위로 올라온다. 원하는 수업의 수강신청에 실패한 학생들이 서로 강의를 맞교환 하거나 돈을 주고 수업을 ‘구매’하는 것이다. 사례 방식은 치킨부터 커피까지 다양하고, 현금 수만원에 거래되기도 한다. 인기 강의의 경우 거래 금액이 10만원에 달하기도 한다.

학생들이 서로 강의를 사고파는 글들을 볼 수 있다. 서울 모 소재 대학 커뮤니티
학생들이 서로 강의를 사고파는 글들을 볼 수 있다. 서울 모 소재 대학 커뮤니티

매 학기마다 이렇게 수강신청 전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학생들이 이른바 ‘꿀강’ 수업에만 몰리기 때문이다. ‘꿀강’은 과제가 적고 여유로운 수업을 말한다. 시험 부담도 적은 편이다. 서울 C여대 강지원(25)씨는 “취업을 위한 ‘스펙쌓기’ 용 대외 활동이나 영어 공부 할 시간도 벅찬데 학교 과제까지 많으면 정말 잠 잘 시간조차 없다”고 말했다. 같은 학교 강미선(25)씨는 “솔직히 배우고 싶었던 수업은 아니지만 학점 잘 받으려고 듣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수강신청 전쟁이 치열하다 보니 학생들이 제 때 졸업하지 못하는 부작용도 발생하고 있다. 졸업을 위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과목 신청에 실패하는 경우가 적잖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학교 측에서 수강신청 하는 학생들의 수요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수업을 개설한 탓이 크다.

수강신청 직전 수업이 갑자기 없어지거나 수강 인원이 대폭 감축되면서 학생들이 피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 작년 지방 D대학에서는 수강신청 직전 사전 통보 없이 교양 필수 과목인 ‘대학영어’ 수업이 대폭 감축됐다. 이에 학생들이 해당 수업을 이수하지 못해 졸업이 미뤄지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학교 측의 별다른 개선책이 없어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돈을 내고 한 학기 더 다니거나 방학 중 계절학기를 들어야 했다.

수강신청 문제로 발생하는 학생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일부 대학은 학생들의 상황에 따라 ‘우선권’을 주는 방식으로 제도를 개선하기도 했다. 숙명여대는 학번-학점-성적순으로 학생들에게 수강신청 우선순위를 부여한다. 이전 선착순 방식에서 우선권 방식으로 수강신청 제도를 개편한 뒤 대체로 학생들의 만족도는 높아졌다. 다만 이 학교 법학과에 재학중인 A씨는 “타 전공 수업을 듣고 싶어도 우선권이 뒤로 밀려나 있어 다른 전공 수업을 신청하기 힘들다는 단점도 있다”고 말했다.

연세대는 2015년부터 수강신청 마일리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마일리지 제도란 듣고 싶은 수업에 본인의 마일리지를 배분하고, 많이 배분한 사람이 수강신청에 우선권을 갖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정치학 개론’ 수업에 A학생이 36마일리지, B학생은 25마일리지를 배분했다면 A학생에게 수강신청 우선권이 주어진다. 같은 마일리지를 배분했다면 재수강 여부, 학점, 수강 과목 수에 따라 우선권이 배정된다. 마일리지는 수강 신청 직전 학생들에게 단과대학 별로 동일한 마일리지가 부여된다.

그러나 개선된 시스템에 대한 평가는 학생들마다 온도 차가 있다. 연세대 경영학과 3학년 한 학생은 “일종의 도박이다. 어느 한 수업에 수강 신청을 한 사람이 몇 명인지, 평균적으로 어느 정도의 마일리지를 걸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마일리지를 많이 건다고 해서 수강 신청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또다른 문제는 수강신청에 실패해도 마일리지는 돌려받을 수 없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또다른 연세대생은 “인기 학과는 비 인기 학과보다 학생들이 전공 수업에 많은 마일리지를 투자할 수 밖에 없어 인기 있는 교양 과목을 신청하는 데 상대적으로 불리하다”고 말했다. 실제 인기 교양 수업인 ‘수화’, ‘현대사회와 심리학’ 등은 학생들에게 배분되는 72 마일리지 중 평균 30 마일리지 이상을 써야 수강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2015년 연세대 총학생회 조사에 따르면 수강생이 몰리는 언론영상학부 전공 수업은 평균 마일리지 15.49점이 필요한 반면 도시공학과 수업은 4.36점이 필요했다.

반면 노어노문학과 권순민씨는 “예전처럼 수강신청을 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 학교에 갈 필요가 없어서 좋다”고 답했다. 하루 종일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수강 인원이 나오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권씨는 “마일리지를 몽땅 ‘꿀 교양’에 걸 수 있어서 듣고 싶은 수업은 웬만하면 거의 다 들을 수 있다. 우리 전공 학생들은 대부분 만족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수강신청 제도의 개선보다 특정 수업에 학생들이 과도하게 몰리는 쏠림 현상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수업의 질을 높이고, 학생 수요에 맞게 강의를 개설하는 학교 측의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생 신다혜(27)씨는 “비싼 등록금을 내고도 듣고 싶은 수업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과거부터 똑 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되고 있는데 학교는 문제가 발생한 뒤 학생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 해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생은 “학생들도 학점 따기 쉬운 수업만 찾을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희성 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은 “학교 측에서 학생들이 수강하는 과목 수와 강좌 수를 학생들이 원하는 만큼 개설하지 않아서 생긴 수요와 공급의 문제”라며 “학교가 과감하게 재정 투자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남우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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