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게시판에 국민청원 9만5,000명
모친 “가해자들 버젓이 생활… 재조사 청원 도와달라” 호소

12명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고, 경찰 수사 중 2차 피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A씨와 언니를 뒤따라 간 A씨의 동생. 두 자매의 어머니는 “딸들을 죽게 만든 건 경찰”이라면서 “재조사 청원에 동참해달라”고 절규했다.

단역배우 자매 사건 재조사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 이 청원에는 19일 오전까지 9만5,000여명이 참여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캡쳐

2004년 7월 동생의 소개로 드라마 보조출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A씨는 경남 하동의 드라마 촬영장에서 연예기획사 보조반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보조출연자를 관리하는 보조반장은 A씨에게 절대권력이었다. 권력을 앞세워 보조반장은 한 달 뒤 A씨를 성폭행하고 자신의 경험을 자랑인 양 다른 반장들에게도 알렸다. A씨는 11월까지 촬영지 인근 모텔, 차량 안에서 반장, 부장, 캐스팅 담당자 등에게 수시로 성폭행과 강제추행을 당했다. 성폭행 가해자는 4명, 성추행 가해자는 8명이었다.

그러나 A씨는 신고를 할 수 없었다. 가해자들이 “주위에 알려 사회생활을 못하게 하겠다. 말하면 동생을 팔아 넘기고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평소 차분하고 조용하던 A씨는 촬영만 다녀오면 이유 없이 물건을 던지고 소리를 질렀다. “OOO을 죽여야 한다”고 욕을 하면서 어머니와 동생을 때리는 지경에 이르자 정신과 치료가 시작됐다. 그리고 어머니는 A씨의 피해 사실을 알게 됐다.

어머니의 신고로 경찰 수사가 시작됐지만, 이게 딸들을 죽이는 일이 될지 어머니는 몰랐다. A씨 어머니에 따르면 경찰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시키지 않고 A씨를 가해자 앞에 앉혀놓은 채 진술을 받았다. 가해자 한 명은 A씨 앞에서 사건 당시 성행위 자세를 흉내내기도 했다. 이런 대질심문은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1년 넘게 이어졌다. 심지어 A씨에게 가해자들의 성기 모양을 정확하게 그려오라는 요구까지 했다.

대질심문을 받고 나온 날 울부짖으며 경찰서 앞 차도로 뛰어드는 A씨를 본 어머니는 경찰 수사 1년 7개월 만에 고소를 취하했다. 이대로 조사를 받다가는 딸이 잘못될까 싶어서였다. 치료를 받으면서 삶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던 A씨는 2009년 8월 28일 오후 8시 18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욕설과 비슷한 발음의 자살 날짜, 시간은 A씨가 세상이 남길 수 있는 분노 표출의 전부였다. 그리고 6일 뒤 언니에게 보조출연 아르바이트를 소개했던 동생은 ‘엄마, 복수하고 20년 뒤 만나자’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뇌출혈로 두 달 뒤 딸들을 따라갔다.

순식간에 가족을 모두 잃은 어머니는 딸들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러나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이미 취하한 고소를 번복할 수 없었다. 방법을 달리 해 2014년 청구한 손해배상 민사소송도 결국 패소했다. 재판부는 “여러 증인들의 증언과 당사자의 신분, 결과를 보면 성범죄를 당했을 여지가 있다”고 했으나 이번에는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가 문제였다. 불법행위를 안 날로부터 3년 안에 청구해야 하는데 A씨가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 4년 6개월이 지나 소를 제기했다는 이유였다.

시력을 거의 잃을 정도로 쇠약해진 어머니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1인 시위에 나섰다. 분을 삭일 길이 없던 어머니는 가해자들의 실명이 적힌 피켓을 들었고, 가해자들에게 명예훼손으로 고발 당했다. 2017년 법원이 “피고인과 두 딸이 겪은 일련의 사건에서 공권력이 범한 참담한 실패와 이로 인해 가중됐을 극심한 괴로움을 보며 깊은 좌절과 슬픔을 금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지만 어머니의 분노를 덜어줄 수는 없었다.

최근 이 사건이 재조명되면서 청와대에 사건 재조사를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등장했다. 자매의 어머니는 19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를 통해 “우리 애들은 경찰이 죽였다. 재조사 청원 (청와대가 답하는 기준인) 20만명이 될 때까지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어머니는 “가해자들이 버젓이 드라마 업계에서 일하고 있다”면서 “제발 이 사람들을 여의도 바닥에서 내쳐달라”고 했다.

허정헌 기자 xscop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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