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법정의 ‘무소유’

#국민이 사랑했던 종교사상가
법정, 스스로 먹을 것 만드는 등
더없이 청빈한 ‘무소유 삶’ 실천
#출가ㆍ득도ㆍ수행으로 점철된 삶
평생 존재 의미 묻고 답변 구해
무소유, 삶의 길 밝혀주는 빛 돼

#우리사회를 적셔준 큰어른
“아름다운 마무리는 모든 순간과
기꺼이 작별하고 받아들이는 일”
그의 가르침, 새로운 시작 알려줘
생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설법하는 법정 스님. 법정 스님은 어려운 이치에 대한 궁구보다 대중 속에서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종교는 철학과 함께 사상의 출발을 이룬다. 서양사상이 그리스철학과 기독교에 기원을 둔다면, 동양사상은 유교철학과 불교로부터 시작됐다. 우리 역사를 돌아봐도 이황, 이이, 정약용과 원효, 지눌, 휴정은 유학과 불교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이다.

사상으로서의 종교가 갖는 의의는 인간의 실존적 질문에 응답한다는 데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하는 근본적 질문이 있다. 왜 사느냐, 어떻게 사느냐, 무엇을 위해 사느냐는 게 그것이다. 이러한 물음에 종교는 인식의 사실판단과 믿음의 가치판단을 제공한다. 종교에서 인식과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지난 100년 동안 이런 근본적 질문에 응답을 구한 종교사상가들은 많다. 함석헌의 기독교사상, 김수환의 천주교사상, 성철의 불교사상은 대표적인 종교사상으로 꼽을 만하다. 이들 종교사상가 가운데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장 사랑했던 이는 누구일까. 그 사람은 스님 법정(法頂ㆍ1932~2010)이지 않을까.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법정의 ‘무소유(無所有)’를 읽어본 이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1976년에 나온 이 책은 수필 형식을 빌려 불교사상의 의미는 물론 현대인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간결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사회 변화가 빨라질수록 우리는 그 변화의 폭과 깊이, 그리고 속도에 압도되어 살아가게 된다. 법정이 펼쳐 보인 무소유 사상은 질주해온 압축산업화 과정에서 새삼 삶의 궁극적 의미를 돌아보게 했다.

개인적으로 법정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무소유’를 읽었을 때였다. 고등학생 시선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소유 사상보다 그가 담담히 전하는 두 인연이었다. 한 인연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이고, 다른 인연은 도반 수연스님이다. 법정은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샘물이 고여 있어서 그렇다”는 어린왕자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도성장에도 불구하고 황량했던 우리사회를 촉촉이 적셔주는 샘물 같은 큰 어른이 바로 법정이었다는 생각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법정의 ‘무소유’

종교사회학을 익히기 위해 한때 불교를 공부한 적이 있다. ‘금강경’, ‘벽암록’, 막스 베버의 ‘불교와 힌두교’를 읽고, 근대 불교를 중흥한 경허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다. 동양에서 불교사상은 대승불교와 소승불교, 교종과 선종, 임제종과 조동종의 발전에서 볼 수 있듯 오랜 역사를 갖는다. 지난 100년 우리 불교의 역사에서 만공, 동산, 효봉, 전강, 그리고 성철 등은 뚜렷한 족적과 업적을 남겼다.

근대가 열린 이후 불교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경허와 성철과 이기영이다. 경허가 휴정 이후 쇠락해온 우리 불교를 다시 일으켰다면, 성철은 ‘돈오점수냐, 돈오돈수냐’ 논쟁을 통해 사상과 수행의 깊이를 더했다. 그리고 이기영은 불교학자로서 원효 사상을 연구하고 불교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탐구했다.

'무소유' 초판본. 별스럽지 않은 에세이처럼 보이지만 30여년간 300만부가 팔려나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법정의 길은 경허와 성철의 길과 사뭇 달랐다. 그는 책과 법문을 통해 우리 시민들과 가까이 소통했다. ‘영혼의 모음’(1973)에서 ‘아름다운 마무리’(2008)에 이르기까지 그의 책들은 불교 교리를 쉽고 분명하게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삶과 사회를 돌아보는 데 마음의 위안과 사유의 통찰을 안겨줬다. 1994년에는 시민단체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었고, 1997년에는 서울 성북동에 길상사를 열어 대중 포교에 힘썼다.

‘무소유’는 ‘국민적 수필집’이라 부를 만하다. 2010년까지 300만부 정도 판매된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이들이 ‘무소유’를 이렇게 사랑한 까닭으로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이 책은 불교의 깨달음을 유려한 문체로 전달한다. 불국사 복원에서 불교의 평화관에 이르기까지 법정이 펼쳐 놓은 이야기들은 영원한 ‘영혼의 모음(母音)’, 다시 말해 그리운 어머니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둘째, 이 책은 무소유 사상을 설파한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법정의 이야기는 이기와 탐욕으로 얼룩진 우리 삶과 사회를 성찰하게 한다.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최고의 신인 물신(物神)의 숭배가 강제하는 일체의 구속에서 벗어나 마음의 진정한 자유를 찾는 것이 바로 무소유 정신이다.

어둔 밤을 비추는 달

법정은 사상가인 동시에 종교인이었다. 종교사상가의 경우 시민들이 공감하는 것은 사상 못지않게 삶 그 자체다. 많은 이들이 법정을 사랑하고 존경했던 까닭은 스스로 먹을 것을 만들고 땔감을 구했던 더없이 청빈한 무소유 실천에 있었다. 법정은 사상의 분별력과 실천의 진정성을 동시에 보여준 우리 시대에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무소유’ 초판을 보면 법정의 약력이 나온다. 1954년 입산 출가, 효봉스님을 은사로 득도, 현재 조계산 불일암 시자, 그리고 약간의 저서와 역서 소개가 그것이다. 약력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삶에서 중요했던 세 가지 일은 출가와 득도와 수행이다. 삶이 괴로워 출가했고, 깨달음을 얻었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진했다는 게 그의 삶 전부였다.

2008년 마지막으로 내놨던 책 '아름다운 마무리'.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0년 3월 일흔 여덟의 나이(법랍 54세)로 법정은 입적했다. 그의 입적을 지켜보며 문득 떠오른 것은 그의 스승 효봉이 남긴 임종게였다.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 다 군더더기. 누가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 법정은 스승을 쫓아 평생 존재의 의미를 묻고 답변을 구했다. 진정한 자유를 갈망했던 그의 무소유 정신은 어둔 밤을 밝히는 은은한 달이 되어 우리 삶이 가야 할 길을 비추는 빛이 된 것은 아닐까.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법정은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의 삶과는 아쉽게 작별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안겨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존재의 위안과 구원과 해방

불교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사상이다. 불교에 따르면, 삶은 고해(苦海)이며, 존재는 덧없는 것이다. 동아시아 선종을 연 6조 혜능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내세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법정은 말한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거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 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강조한다. “정말 우리 마음이란 미묘하기 짝이 없다. (...)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고 옛사람들은 말한 것이다.”

마음의 구속에서 벗어나 마음의 주인이 되어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은 불교의 종교적 이상이다. 임제종을 연 임제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선어를 남겼다. ‘어디를 가든 그곳에서 주인이 되면, 그곳이 진리의 자리가 된다’는 의미다. 임제는 인간 주체의 자율성을 열렬히 옹호함으로써 이 자율성이 선사하는 자기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철저히 추구했다.

2010년 3월 13일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진행된 법정 스님의 다비식. 법정 스님의 생전 당부에 따라 관도 만들지 않은 채 치러졌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보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은 세계화와 정보사회의 진전이 가져온 결과의 하나로 정체성의 위기를 주목한 바 있다. 정체성 위기의 다른 말은 삶의 의미 상실이다. 넘쳐흐르는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많은 이들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의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오늘날 어느 나라든 물질문명이 가져온 풍요는 천상의 화음으로 울리는데 두 다리로 버티는 지상의 세계는 불안과 절망과 분노의 비명이 퍼지고 있다. 천상의 화음과 지상의 비명 사이에서 자신에게 맞는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것은 현대인의 자아정체성이 감당해야 할 실존적 과제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는 데 종교는 우리에게 여전히 위안을 안겨주고 구원을 제시하고 해방을 인도한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불교는 삶의 무의미를 승인함으로써 그 무의미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는 사상 및 신앙의 체계다. 현대인의 삶을 규정하는 이기주의ㆍ경쟁주의ㆍ물질주의에 맞서서 불교는 생명주의ㆍ다원주의ㆍ정신주의를 역설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아정체성은 질주하는 사회로 인해 더욱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불교를 포함한 종교의 지혜가 존재론적 위안과 구원과 해방의 길을 안내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김수영의 ‘김수영전집’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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