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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왕국 속 당찬 ‘안나’, 실제로는 신데렐라 판박이

입력
2018.03.17 10:0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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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금융권 인사에서 여성들이 잇따라 임원에 올랐다. 여성 정치인들도 오는 6월 지방선거에 대거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 국가고시에서 여성 합격자 수가 늘고, 여성이 사관학교ㆍ경찰대 수석 졸업을 차지했다는 보도가 이어지면, 10년 넘게 반복된 이야기가 또 다시 나온다. ‘여풍(女風)’이 거세다는 것이다.

텔레비전 보는 남자와 요리하는 여자가 그려진 삽화가 성 역할을 고정시킨다는 이유로 지탄 받는 시대가 왔지만, 여풍당당한 사회가 됐고 성적 고정관념 역시 해소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아이돌 선발대회에서 “주인공은 나야 나!”라고 외치는 건 남성 아이돌 그룹이고, “나를 붙잡아줘, 안아줘, 뽑아줘(pick me up)”라고 애원하는 건 여성 아이돌 그룹인 게 단순히 우연일까. 물론 남자다움을 강요받는 남성 역시 성적 고정관념의 피해자다.

성적 고정관념은 우리가 접하는 다양한 대중매체를 통해 알게 모르게 학습된다. 미국 워싱턴대 연구진은 머신러닝(Machine Learningㆍ기계학습) 기반의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을 이용, 미국 할리우드 영화 800편에 등장하는 남녀 등장인물의 대화를 분석했다. 이 연구결과는 지난해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학술대회 ‘자연어 처리의 경험적 방법에 관한 회의’에서 발표됐다.

2013년 개봉한 영화 ‘겨울왕국’에서 여주인공 안나는 얼어버린 왕국의 저주를 풀고, 언니(엘사)를 구하려 고군분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이다. 하지만 연구진의 분석 결과, 안나가 많이 사용한 단어는 정작 ‘요청하다’ ‘기다리다’ ‘필요하다’ 등 권력과 선택의지가 낮은 동사가 주를 이뤘다. 연구진은 “1950년대 만들어진 영화 신데렐라에서 신데렐라가 사용한 언어의 권력ㆍ선택의지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주연배우 자리를 노리는 여성 발레리나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영화 ‘블랙스완’에서도 여성 등장인물은 대화ㆍ독백에서 모두 남성보다 권력이 낮은 동사를 많이 썼다.

반면 영화 속 남성은 ‘끝내다’ ‘파괴하다’ ‘지정하다’처럼 권력과 선택의지가 높은 동사를 주로 썼다. 이 같은 경향은 코미디 드라마 공포 스릴러 공상과학(SF) 등 영화 장르와 상관없이 비슷하게 나타났다.

학습된 고정관념은 반복된다.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 남자와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크게 다르지 않은데도, 높은 음역대로 우는 남자아이는 남성성이 적고 낮은 음역으로 우는 여자아이는 여성성이 부족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게 연구로 입증됐을 정도다. 부족한 남성성ㆍ여성성을 채우려는 부모의 노력이 오히려 고정관념을 키우고 공고히 할 수 있다.

성적 고정관념에서 자유롭던 아이들도 이런 통념을 빠르게 받아들인다. 대표적인 게 수학ㆍ물리 등 천재성이 강조되는 학문에선 남성이 우세하다는 생각이다. 미국 일리노이대 연구진은 여자아이들이 6세 때부터 ‘남성은 머리가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연구결과를 지난해 1월 국제과학학술지 ‘사이언스’에 내놨다.

연구진은 5~7세 아동 96명(연령마다 32명)에게 뛰어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뒤 그가 남성일지, 여성일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5세에선 남녀 아동 모두 뛰어난 사람이 자신과 같은 성(性)일 것으로 생각했다. 6ㆍ7세 남자 아동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6ㆍ7세 여성 아동은 뛰어난 사람이 자신과 같은 성별을 가졌을 거라고 여긴 비율이 크게 하락했다.

남녀 아동에게 머리가 좋은 아이를 위한 게임과 열심히 노력하는 아이를 위한 게임 중 어떤 것에 더 관심 있냐고 물은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5세 여성 아동은 머리가 좋은 아이를 위한 게임에 더 흥미가 있다고 답했으나, 6ㆍ7세 여성 아동은 열심히 노력하는 아이들을 위한 게임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남성 아동들은 이와 정반대 모습을 보였다. 연구진은 “직업을 선택할 때 성적 고정관념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결과”라고 설명했다. 일부 여성의 눈부신 약진을 두고, 이게 모든 여성의 성취라고 박수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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