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장관 경질되기까지

13일 전격 해임된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침통한 표정으로 마지막 고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워싱턴=EPA 연합뉴스

14개월 만에 ‘포기 바텀’(미 국무부 청사가 있는 구역)을 떠나게 된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의 경질 과정은 한편의 권력 드라마였다. 트위터로 해고 통보를 받은 것도 모자라 해고에 항명한 부하 직원까지 내침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고별 기자회견장에 선 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을 단 한 차례도 부르지 않는 것으로 울분을 드러냈다. 북미 정상회담을 둘러싼 갈등이 해고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다. 미국 언론들은 학대에 가까운 해고 통보 방식에서 백악관의 비정상적 운영을 엿볼 수 있다며 비판을 쏟아냈다.

지난해 2월 취임 이후 끊임 없이 경질설에 시달린 틸러슨 장관의 해고에는 잔인한 예고편이 있었다. 아프리카 순방 일환으로 케냐를 방문 중이던 지난 10일 새벽 2시30분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내용은 “빨리 먼저 그만두지 않으면 경질 당할 것이다. 후계자는 정해져 있는 데 언제 발표 날지 모르겠다”는 통보였다.

구체적 시점은 명시하지 않았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언질이었다. 일종의 ‘아웃소싱’ 해고 방식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맘에 들지 않는 참모들을 내칠 때 공개적으로 면박을 줘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 방식을 선호해왔는데 이번엔 간접통보였다.

충격을 받은 틸러슨 장관은 이날 “건강상의 문제”라며 현지 일정을 전격 취소했고, 12일 일정을 앞당겨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워싱턴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에게 “토요일 새벽에 전화 한 통화를 받고 잠이 깼는데 그 이후로 계속 깨 있었다”고 말했다.

그 사이 워싱턴에는 틸러슨 경질 소식이 전해졌다. 워싱턴포스트(WP)가 “원래 북미 정상회담 수락을 발표한 다음날인 금요일(9일) 경질하려 했지만 켈리 비서실장이 ‘(귀국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렸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전 8시 44분 트위터에 해고 통보 메시지를 올리며 쐐기를 박았다. 틸러슨 장관에게는 경질 사유 등 어떠한 설명도 직접 하지 않았다.

날벼락을 맞은 국무부는 즉각 스티브 골드스타인 차관 명의로 성명을 발표하고 “틸러슨 장관은 내각에 더 남으려는 의지가 확고했다. 어떠한 정식 통보를 받지 못했고 경질 이유도 알지 못한다”고 반발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현직을 맡은 지 3개월 밖에 안된 골드스타인 차관을 파면했다.

해고 드라마는 틸러슨 장관의 고별 기자회견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는 13일(현지시간) 오후 2시 국무부 기자회견장에 침통한 표정으로 나타난 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조지프 던퍼드 합참의장 등을 열거하며 감사함을 표시했다. 그러나 대북 압박이 큰 성과를 거뒀다는 말만 했을 뿐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쏟아지는 질문에도 십자가를 그리며 기도한 뒤 퇴장했다.

미국 언론들은 틸러슨 장관과 트럼프 대통령의 14개월 간의 불편한 동거가 최후의 순간까지 모욕적 결말로 막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틸러슨과는 정말 생각이 다르다”고 말했을 만큼 거의 모든 대외 정책에서 사사건건 대립했다.

북핵 문제, 이란 핵 협상, 파리 기후변화협정, 러시아 제재 및 대중국 정책에서 두 사람은 늘 대척점에 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무부 예산을 삭감하며 틸러슨 장관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이에 틸러슨 장관도 트럼프 대통령을 사석에서 “멍청이(moron)”라고 불렀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서 별도로 부인하지 않으며 신경전을 펼쳤다.

WP는 이번 해고의 결정적 도화선은 북미 정상회담 성사 과정에서 갈등이라고 전했다. 아프리카 순방 중이었던 틸러슨 장관이 “북미 직접 협상에 대해 갈 길이 멀다”고 발언한 지 5시간 뒤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수락하면서 ‘틸러슨 패싱’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단단히 체면을 구긴 틸러슨 장관은 백악관 참모들에게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했고, 이를 전해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경질을 결심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미국 언론들은 틸러슨 해고 사태의 근원에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독단적 성격이 자리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참모들을 무조건 쳐내고, 즉흥적인 선택을 일삼는 국정운영 방식에 대한 불안감도 동시에 커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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