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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말할 테니 들어라

입력
2018.03.13 14:44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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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정도부터였을까, 나 혼자 하던 운동이 있다.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 보자면 ‘성비 맞추기’ 정도일까. 내용과 방식은 단순하다.

첫째로, 어떤 자리에서든 남성이 더 많이 말하면, 나도 그만큼 말해 남녀 간 발언 절대량의 젠더 균형을 맞춘다. 발언의 내용이 좋으면 좋지만, 솔직히 이 운동의 핵심은 말의 절대량을 맞추는 것이라 내용의 수준까지 유지하기는 어려울 때도 있다. 말이 많으면 밀도를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준은 그 다음 단계 목표고, 일단은 어쨌든 남자가 말하는 만큼 여자도 말한다, 이것이 첫 번째다.

둘째로, 내가 결정권이나 추천권을 가진 경우 무조건 여성을 먼저 추천한다. 변호사라는 업무의 특성도 없지는 않겠지만, 어떤 자문회의, 실무자 회의, 심포지엄, 강연, 간담회를 가도 남성이 많다. 성비가 1:1로 맞는 경우조차도 거의 없다. 그러니 내게 누군가를 추천해 달라는 부탁이 오면 성별을 우선 고려한다. 후보자에게 능력도 있으면 좋고, 사실 이것은 위 첫 번째와 달리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뛰어난 여성은 참으로 많고 많기 때문이다. 작게는 강의 후 청중들에게서 질문을 받아도, 가능하면 여성을 먼저 지목한다. 그러지 않으면 오로지 남성들만 질문하고 발언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쓴다.

셋째로, 같은 자리에서 여성이 발언하면 최대한 지지하고 동의한다. 생각이 다르면 어떻게 하냐고? 놀랍게도, 대부분의 여성은 생각하고 말을 하면 맞는 말을 한다! 대부분의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면 그럭저럭 맞는 말을 하듯이. 여성의 주장이 터무니없어 반박해야 하는 상황은 좀처럼 없다. 특히 성비가 불균형한 자리에서 여성이 하는 말은 다듬어지고 또 다듬어진 말일 때가 많기 때문인 것 같다. 일단 해 보니. 이 세 가지 중 세 번째가 가장 쉬웠다.

그러면 이 세 가지 중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첫 번째다. 우리 사회의 남성이 가진 발언권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남성의 말을 듣는 데 우리가 할애하는 시간의 양이 얼마나 엄청난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정말 ‘끝없이’ 말하는지! 첫 번째 운동의 목표를 이루려면 거의 항상, 남성 발화자의 말을 끊고 들어가야 한다. 처음에는 놀라울 정도였다. 나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밀도가 아주 낮고 정보가치가 별로 없는 말이라도, 우리 사회는 남성의 언어에 일단 ‘계속할 것을 허락 받은 힘’을 부여한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그 힘이 있는 한 성비가 맞을 수가 없다. 게다가 그 이면에는‘여성은 듣고 호응할 것을 요구하는 힘’이 있다.

하루는 시간을 재 보았다. 내가 먼저 입을 열지 않고, 단지 남성 참가자들이 너무 길게 말하고 여성 참가자들이 너무 적게 말하는 것 같을 때만 어림잡아 1:1을 맞출 만큼 말을 했는데, 종일 거의 6시간을 말했다. 그래도 겨우 절반이었는데! 대체 남자들은 왜 이렇게 말이 많은지!

요즈음 여성들이 말이 많아졌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남자는 무슨 말을 못 하겠다는 조금의 재미도 없는 너스레를 떠는(아, 그런 말에 시간을 쓸 수 있는 힘!) 남성들도 있다. 내 단언컨대, 초시계를 켜놓고 잰 다음 비교해 보면 아직 여성의 말은 남성의 반에도 턱없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말을 모아 쌓아 놓고 보면, 그 중 여성의 말 덩어리는 남성의 말 덩어리에 비해 아주 작을 것이다. 들리지 않고 삼켜진 말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남성의 말을 끊기 어려워 망설이는 사이 사라진 말들이 훨씬,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 나에게 주어진 1,800자를 써서 말한다. 남성들은, 일단 들어라. 최소한 절반이 될 때까지. 말할 테니 들어라.

정소연 SF소설가(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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