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본회의장

처음부터 비관적이긴 했다. 헌법 개정의 키를 쥔 국회의원들이 적극적으로 제 머리 깎으리란 기대는 어려웠다. 다만 대통령 후보로 나선 사람들이 한입으로 했던 ‘6월 지방선거와 개헌안 국민투표 동시 실시’ 약속이니 믿어볼까 했는데, 역시 제1야당 자유한국당 대표에게 공약(公約)은 말 그대로 공약(空約)이었나 보다.

가장 적극적인 개헌론자였던 정세균 국회의장도 결국 손을 들었다. “차선책도 조금씩 논의할 때가 됐다”는 정 의장의 7일 발언은 6월 개헌안 국민투표 가능성이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마지막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가 남았지만, 이미 동력은 소진된 상태다. 국민헌법자문특위 마련 개헌안을 13일 대통령이 보고 받으면 입장이 나오겠지만 한국당의 완강한 반대를 넘어서긴 힘들어 보인다.

6월 개헌 사실상 무산의 가장 큰 책임은 한국당의 선거공학 표 계산 때문이다. 또 정부형태에 집착하는 정치권의 이해타산도 영향을 미쳤다. 최순실에 휘둘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실패를 교훈 삼아 대통령에게만 쏠린 권력을 제한해야 한다는 촛불혁명의 개헌 요구는 옳았다. 그런데 정치권은 대통령 권력 분산 논의보다는 ‘대통령제냐, 의원내각제냐, 이원집정부제냐’ 같은 정부형태 잿밥에만 관심이었다. 한국당의 6월 이후 개헌 논의 주장도 선거 패배 후 이원집정부제 같은 정치적 구명보트에 올라타겠다는 의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연말까지 개헌을 재시도하겠지만 전망은 비관적이다. 국가로부터 우리의 기본권을 제대로 확보하고, 1987년 이후 30년 동안 달라진 한국 사회상을 반영한다는 내용의 헌법 개정에 동의하는 200명 이상의 국회의원을 확보하지 않는 한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만 이번 기회에 다들 ‘130개의 약속, 대한민국 헌법’을 들여다봤으면 좋겠다. 다시 개헌의 기회가 올 때 우리의 권리를 제대로 확보하기 위해선 정치인보다도 우리 시민들의 헌법 이해도가 더 높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대학 다닐 땐 헌법과 사법체계라는 그물 자체가 반민주 독재정권의 도구라는 반감이 심했다. 헌법 130개 조항을 제대로 볼 일이 없었다. 기자 일을 하면서도 필요할 때 헌법 조문을 찾아본 적은 있어도 이를 깊이 고민하지는 않았다. 큰 잘못이었다. 이번에 헌법을 새겨 읽고, 그에 관한 책을 몇 권 읽다 보니 각 개인이 헌법을 챙겨보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헌법 제37조 제2항의 ‘(법률로)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대목은 인상적이었다. 제21조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 부분도 너무 소중했다. 제34조 제1항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는 대목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장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이밖에도 ‘근로자’, ‘양성평등’ 등 고민해볼 개헌 의제가 무궁무진했다.

김진한 전 헌법연구관은 저서 ‘헌법을 쓰는 시간’에서 스스로 괴물로 변해가는 권력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고민했다. 그리고 “헌법은 최종적 효력을 국민에게 의존한다. 국민들이 헌법의 내용을 알고, 최고 권력도 헌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믿고 있을 때만이 권력으로 하여금 순순히 따르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헌법은 제정에 의해 존재하는 법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 내용 그대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을 때 비로소 존재하고 효력을 발휘한다”라고 썼다.

정치인들이 권력과 정부형태를 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나와 우리를 둘러싼 개개의 헌법 조항들이다. 헌법에 나온 우리의 자유ㆍ평등ㆍ연대 가치를 자각하는 게 더 필요하다. 헌법을 새겨 읽고, 반추하고, 그 안의 가치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일이 앞으로 필요해 보인다. 그런 힘을 바탕으로, 우리들의 헌법을 다시 쓰기 위해 정치권을 바꿔야 할 시간이다.

정상원 정치부 차장 orn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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