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9월 이산가족 상봉 등을 논의하기 위해 서울을 찾은 북한 적십자 대표단. 이들은 4박5일 일정 내내 한국 대표단과 진지한 토의와 대화를 나눴을까. 정답은 ‘아니오’다. 남북적십자 제2차 본회담 마지막 날이었던 9월15일 공식 일정과 실제 일정은 달랐다. 외부에는 밤 9시30분부터 숙소(타워호텔)에서 영화 ‘의사 안중근’을 감상한다고 알렸지만, 다른 곳에 있었다. 북적 대표단장 김태희(북적 중앙위 위원장)와 자문위원 윤기복(노동당 중앙위 과학교육부장) 등 14명은 요정 오진암(梧珍庵ㆍ당시 종로구 익선동) 밀실에서 베풀어진 한국 측 주최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다.

70년대 오진암은 권력집단과 재벌들만 드나들던 최고 유흥주점으로 알려져 있다. 이 업소가 ‘북에서 온 귀빈’을 상대한 건 처음이 아니었다. 3개월 전인 그 해 5월30일 김일성 밀사 박성철을 위한 잔치도 열렸다. 연회상에 오른 요리만 34종에 오를 만큼 호화판이었다. 북에 갔던 우리 대표단을 북한이 어떻게 대접했는지는 모르지만, 남에 온 북측 인사들에 대한 환대는 꽤 오래 이어졌다.

이런 사정은 한국일보 등 국내 언론에 애초부터 포착됐다. 다만 70년대 서슬이 퍼런 정부의 ‘보도관제’ 때문에 공개되지 못했다. ‘카더라’ 통신의 형태로 암암리에 퍼져 알만한 사람들만 알고 역사 속에 덮였다.

50년 가까이 된 과거를 들먹인 건 지금도 남북ㆍ북미대화에 일종의 ‘보도관제’가 개입하는 듯 하기 때문이다. 물론 외부 ‘보도관제’는 이제 없다. 남북ㆍ북미관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처지에서 비롯된 ‘자기 검열’을 말한다. ‘그렇게 돼야 하는 것’에 대한 열망이 ‘실제로 그런 것’을 전달할 때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 대 브라질 축구 전망처럼 ‘당위’와 ‘바람’ 때문에 ‘팩트’를 되도록 좋게 해석하는 경향이 짙다.

지난 9일 북미 정상회담 발표도 그랬다. 북한 비핵화의 중요성, 회담이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바람 때문일까. 한국 언론은 ‘5월 회담’을 기정사실로 받아 들였다. 하지만 미국은 좀 달랐다. ‘트럼프가 회담 제의에 동의했다’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미국 예측시장은 실제 성사 가능성을 50%대로 보고 있다. 첫날에는 60%대 수준이었지만, 미 의회의 견제와 전문가들의 우려 목소리가 나오면서 이제는 50%대 중ㆍ후반에 머물고 있다.

일부러라도 비관적 시각에서 점검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반드시 열려야 할’ 트럼프ㆍ김정은 회담이 결과적으로도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4월에 트럼프를 만난다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주제 넘은 훼방꾼’에 불과할까.

두 가지 모두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 트럼프 대통령이 멋대로 협상하고 보상은 한국이 맡으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국경장벽 쌓으면서 돈은 멕시코에 내라고 하는 일이 재연될 수 있다. 비핵화 협상의 문턱을 높이려는 아베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해도 상황이 꼬일 수 있다. 말이 동맹이지, 미국을 두고 한국과 일본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사태도 우려된다.

결국 ‘한미관계가 얼마나 견고한가’에 달렸다. 청와대는 ‘한미관계는 긴밀하고 두텁다’고 안심시킨다. 백악관도 ‘한미관계에는 빛이 샐 틈조차 없다”고 동조한다. 그러나 백악관은 일본에게도 ‘미일관계는 완벽하다’고 강조한다.

심정적으로 청와대를 믿고 싶지만, 걸리는 게 있다. 지난달 8일 마이크 펜스 부통령 방한 때 일이다. 그가 오산 미 공군기지에 도착한 뒤 백악관은 수행 기자들에게 자료를 배포했다. 영접 나온 인사 명단이었다. 그런데 주미 한국 대사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안호영 전 대사로 적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현 조윤제 대사로 정정되기까지는 2시간11분이 걸렸다. ‘문ㆍ김’ 회담 못지않게 청와대가 ‘문ㆍ트럼프’ 회담을 서둘러야 할 상황이다. 조철환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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