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상스토리(7)] 정석에 대한 의구심이 좋은 성적으로

9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만난 김지석 9단이 지난 1일 한국팀 우승으로 막을 내린 ‘제19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반가웠습니다.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제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줬기 때문에 더 좋았습니다.”

아직도 짜릿한 듯 했다. ‘도대체 왜, 당연한 건가’로 항상 머리 속을 괴롭혔던 기존 반상(盤上) 정석(定石)에 대한 거부감이 구글 인공지능(AI) 알파고의 파격적인 등장과 함께 용인되면서 중요한 진검승부에서의 승리로 이어졌다는 쾌감으로 보였다. 지난 1일 유일한 세계 바둑 단체전인 ‘제19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우승상금 5억원) 결승에서 중국 간판 스타인 커제(21) 9단을 물리친 김지석(29ㆍ한국랭킹 4위) 9단이 우승 비결을 알파고에게 돌린 까닭이다.

9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만난 김 9단은 “농심신라면배가 중요한 대국이긴 했지만 특별히 준비하거나 마지막에 만난 커제 9단을 의식하진 않았다”며 오히려 이번 대회 우승의 의미 보단 알파고의 존재를 더욱 언급했다.

김 9단은 바둑계의 ‘뜨거운 남자’다. 김 9단은 올해 16승1패(승률 94.11%, 1위)로 고공행진 중이다. 세계 바둑계 주류인 한ㆍ중ㆍ일 3국의 국가대항전으로 벌어지는 농심신라면배에서 중국의 강자인 당이페이(24) 9단과 커제 9단을 잇따라 꺾고 우승컵까지 들어올렸다. 농심신라면배는 지난 2004년 한국 바둑의 전설인 이창호(43) 9단이 홀로 중국과 일본 기사 5명을 모두 제압하면서 ‘상하이(上海) 대첩’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였을까. 김 9단은 이번 대회를 통해 얻은 게 많다고 했다. “승부란 게, 꼭 이기고 싶다고 해서 승리로 연결되진 않는 것 같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기회는 찾아온다는 것을 이번 대회에서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김 9단은 실제 이번 농심신라면배에서 당이페이 9단과 커제 9단의 대국을 모두 역전승으로 장식했다. 특히 커제 9단과의 대국에선 대마가 몰살당한 상황에서 끈질긴 추격전으로 기적 같은 승리를 일궈냈다. 덕분에 김 9단은 커제 9단과의 상대전적도 4승2패가 됐다.

김지석 9단은 철저하게 바둑은 ‘본인과의 싸움’이라며 주변의 시선이나 평가에 흔들려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하지만 김 9단에게도 천적은 있다. 국내 랭킹 1위인 박정환(25) 9단이다. 상대전적도 6승 20패로, 김 9단은 박 9단에게 유독 약했다. 지난 2015년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우승상금 3억원) 결승에선 다 잡았던 대국을 막판 실수로 놓치면서 깊은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정환이는 동생이지만 훌륭한 후배예요. 라이벌로 생각하진 않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가 배울 게 많거든요.” 자존심 강하기로 소문난 김 9단이지만 박 9단에 대해선 후하게 평가했다. 김 9단은 박 9단과 12일부터 3번기(3전2선승제)로 예정된 ‘제36기 KBS바둑왕전’(우승상금 2,000만원) 결승전에서 맞붙으면서 3년 만에 설욕의 기회를 잡은 상태다. 현재까지 벌어졌던 3번의 결승 맞대결에선 박 9단이 김 9단에게 모두 승리했다.

김 9단은 후배들에 대한 따끔한 충고도 빼놓지 않았다. “요즘 후배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나는 어차피 해도, 누구한텐 안 될 거야. 어차피 1등은 힘들다’라면서 미리 포기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은 것 같거든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러거든요. 자타가 공인하는 커제 9단도 절대 두려운 상대가 아닙니다. 특별하지 않다는 겁니다. 정말 중요한 건, 자기 자신입니다.” 김 9단이 ‘나에게 라이벌은 없다’며 본인과의 싸움을 가장 큰 대결로 여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김지석 9단이 지난 1일 한국팀 우승으로 막을 내린 ‘제19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결승전에서 만난 중국 커제 9단과의 대국을 복기하면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동료들 사이에선 ‘삼성화재배 월드 바둑 마스터스’(우승상금 3억원) 대회 타이틀을 가져왔던 지난 2014년을 저의 전성기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전성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데도 말입니다.” 본인 이외의 주변 평가나 시선은 전혀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게 김 9단의 냉정한 판단이다. 다른 프로바둑 기사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포석이나 행마 등에 대해서도 김 9단은 항상 본인만의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면서 더 좋은 수를 연구한다. 한 때 세계 바둑을 평정했던 조치훈 9단(62)이 기대되는 한국 기사 한 명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인터넷에 김지석 기사의 기보가 올라오면 가장 먼저 챙겨 본다”며 “바둑 내용이 진짜 좋고 같은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움을 느낀다”고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 9단은 후배들과 한국 바둑계를 위한 각오도 밝혔다. “다른 게 있을까요. 올해도 굵직한 세계대회들이 많이 예정돼 있어요. 여기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이고 역할입니다. 그게 진짜 모범 정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미 그의 시선은 다가올 또 다른 반상으로 향했다. 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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