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약용의 죽음, 수만권 서고가 무너지다

우리 전통 수묵인물화의 1인자로 꼽히는 김호석 화백이 2009년 새롭게 만들어 공개한 다산 정약용의 초상화. 어릴 적 천연두를 앓았던 흔적 등 사실적 묘사를 위해 엄청난 공을 들였다. 안경은 다산의 엄청난 독서와 저술 활동은 물론, 서양 문물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연재를 시작하며

다산에 대한 새 여정을 시작한다. 2006년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을 처음 출간한 뒤 지난 10여년간 다산과 함께 울며 웃고 지냈다. 그의 자료는 지금도 계속 나와 좀체 눈을 뗄 수가 없다. 다산은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서문에서 추수가 끝난 들판에도 떨어진 이삭이 너무 많아 줍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 내 심정이 꼭 그렇다. 소중하고 뜻 깊은 장면인데, 학술적 글쓰기에서는 다루기 힘든 편린들을 모아 조각보로 꾸며 볼 작정이다.

1938년 최익한은 신문지상에 ‘『여유당전서』를 독(讀)함’이란 글을 65회에 걸쳐 연재했다. 다산 저작과 사유의 전모를 최초로 드러낸 기념비적인 글로, 지금으로부터 꼭 80년 전의 일이다. 그가 그때 ‘여유당전서’를 꼼꼼히 읽었다면, 나는 이번 연재에서 다산의 책이 아닌 ‘다산이라는 책’을 읽고 싶다. 완전무결한 성인 다산보다 사람 냄새 나는 인간 다산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다.

다룰 내용은 다산의 사람됨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작업 과정, 절망에 처한 인간의 고뇌와 상황 대처 능력, 사각지대에 놓인 자료의 발굴에서부터 그의 인간적 결점과 그늘까지를 포함한다. 횡설수설, 좌충우돌로 새로운 형식의 다산 평전을 꿈꾼다. 생애의 모든 것을 담기 보다 디테일의 클로즈업 또는 줌인이라고나 할까? 삼가 성원과 질정을 청한다.

지식을 부귀영화와 맞바꾸랴?

1836년 2월 22일, 다산이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부고를 들은 처가 쪽 먼 친척 홍길주(洪吉周・1786~1841)가 말했다. “그가 죽다니, 수만 권의 서고가 무너졌구나.” 당시 서울에 머물고 있던 제자 이강회(李綱會・1789~?)는 큰 집이 기울어져 덮쳐오는 꿈을 꾸었다. 다산은 실로 한 동의 거대한 도서관 그 자체였다. 그 집이 무너진 것이다.

이 날은 원래 다산 부부가 결혼 60주년을 축하하는 회혼례 당일이었다. 잔치를 축하하러 속속 모여든 손님들이 그만 문상객이 되고 말았다. 홍길주는 이날 아침 ‘정다산승지회근수서(丁茶山承旨回巹壽序)’란 축하 글을 보냈던 터였다. 그 글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다산 정대부는 박식함이 우주를 꿰뚫고, 깨달음이 미세한 것에까지 투철하였다. 쌓아둔 것이 드넓고 다룬 분야가 많아서 어떤 것이든 환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세상이 그를 버린 것이 또 몇 십 년이나 되니, 강가에서 한가로이 노닐어도 벼슬을 내리는 문서는 한 번도 이르지 않았다.”

이 말을 들은 이가 그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다며 탄식했다. 홍길주는 그의 운명은 애초에 한 번도 궁한 적이 없었다며, 하늘이 사람에게 복을 줄 때 한 가지만은 늘 주지만, 두루 갖추는 것에는 인색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시 말을 이렇게 이었다.

“궁하게 살면서도 늙도록 저술하기를 그만두지 않아, 위로는 도서(圖書)와 상수(象數)의 오묘함에서부터, 구경(九經)과 백가(百家), 문자와 명물(名物)의 풀이 및 병법과 농사, 정치제도, 백성을 다스리고 옥사를 처리하는 규정에까지 미쳤고, 부분별로 책을 쌓더라도 거의 키와 맞먹을 정도였다. 이를 펼친다면 모두 시대에 보탬이 되고 사람에게 혜택을 줄 수가 있으니, 이것을 부귀영화와 맞바꿀 수 있겠는가?”

답안지로 등수까지 맞추다

홍길주는 당대가 손꼽은 천재 중 한 사람이었다. 대제학을 지낸 홍석주(洪奭周)의 아우요, 정조의 외동 사위인 해거도위(海居都尉) 홍현주(洪顯周)의 형이었다. 그는 ‘수여방필(睡餘放筆)’ 연작에 다산에 얽힌 여러 일화들을 채록해 두었다. 다음은 그 중 하나다.

어떤 사람이 과거에 응시한 후, 자신이 지은 글을 다산에게 보여주었다. 답안지를 본 다산은 시험 본 장소를 먼저 물었다. 당시 과거는 두 곳에서 나누어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두 번째 장소에서 보았다고 하자, 다산이 말했다. “장원으로 급제하겠군. 첫 번째 장소에서 보았더라면 낙방했을 게야.” 그러고 나서 답안지 가운데 특별히 잘된 대여섯 구절에 비점(批點)을 찍어 표시를 하고 한두 단어에 밑줄을 쳐서 돌려주었다. 방이 붙었는데 과연 그가 장원으로 뽑혔다. 채점관이 비점 치고 밑줄 그은 부분도 다산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사람들이 놀라 어찌 알았느냐고 묻자, 다산의 대답이 이랬다. “내가 두 곳의 시험을 주관하는 자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일 뿐일세.” 그의 통찰과 직관이 이러했다.

나만의 목소리를 낸다

다산은 평생 다양한 분야에서 엄청난 작업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웠지만, 반드시 자기 색깔을 입혔다. 자기만의 주장이 분명했다. 남이 한 말을 맥없이 되풀이해 정리하는 일에는 아예 손을 대지도 않았다. 작업마다 핵심가치가 분명했고, 그의 손을 한번 거치고 나면 이전 것과 차별화된 콘텐츠로 재탄생해 반짝반짝 빛났다.

홍길주는 또 이렇게 썼다. “다산은 책을 저술하여 집에 정돈해둔 뒤에, 중국 사람이 지은 책을 보다가 자신의 주장과 같은 것이 나오면 곧장 지은 것을 꺼내어 표시해두곤 했다. 남이 한 말을 답습하기를 부끄러워함이 이와 같았다.” 또 다른 글에서 홍길주는 자신만의 창안으로 자부했던 ‘서림일위(書林日緯)’란 자신의 저술이, 뒤에 보니 중국 사람이 엮은 ‘월령수편(月令粹編)’이란 책과 뜻과 범례가 거의 같고, 목차는 오히려 더 자세한 것을 보고 망연자실했던 스스로의 경험을 적고 나서, “다산 정약용이 이 같은 경우를 당했다면 반드시 자기가 지은 것을 불 질러버렸을 것이다”라고 적기까지 했다. 다산은 남에게 지기 싫어했으므로, 답습에 대한 혐오가 이러했다.

과도한 자기 확신으로 독선이 지나칠 때도 있었다. 쾌도난마로 판단을 내리면 명쾌하고 통쾌해서 좀체 다른 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적도 많이 만들었다.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는 수많은 용어나 명칭의 혼용과 오용을 바로 잡았다. 홍길주는 이 책을 읽은 뒤, “근거를 끌어옴이 정밀하고 해박하며, 변정하여 논란하는 것이 상세하고 자세해서 다른 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다만 종종 지나치게 국한됨이 있는 것을 면치 못했다”고 썼다. 홍길주는 “내가 한 권의 책을 지어 조목조목 따져 논박하려 했으나, 그의 아들과 사이좋게 지내는지라 그만두었다”고 적기도 했다. 다산은 한번 논쟁을 시작하면 상대가 승복할 때까지 끝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런 일은 아예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편에 가까웠다.

“다산, 근세의 1인자”

홍길주는 다산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다시 남겼다. 6촌 동생 홍한주(洪翰周)가 쓴 ‘지수염필(智水拈筆)’에 나온다. “다산의 재주와 학문은 남보다 뛰어나 경사(經史)와 제자백가 외에 천문지리와 의약잡방(醫藥襍方)의 책도 해박하지 않음이 없다. 13경은 모두 자신만의 견해가 있다. 저술한 책이 집에 가득한데, ‘흠흠신서’와 ‘목민심서’ 같은 책은 또 모두 옥사를 살피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을 위해 유용한 글이다. 이는 추사(秋史)에 견주더라도 높은 재주와 실다운 학문이 훨씬 높다. 단지 우리나라 근세의 1인자일 뿐 아니라, 중국에 가져다 두더라도 마땅히 기윤(紀昀)이나 완원(阮元)의 아래에 두지 못할 것이다.”

기윤은 청나라의 문화역량이 결집된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책임 편집자였고, 완원은 추사가 스승으로 섬겨 호를 완당(阮堂)으로 바꿨던 경학대사(經學大師)였다. 홍길주가 보기에 다산은 그들에 견줘도 막상막하였다. 그는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뜨자 홍길주는 수 만권의 서고가 무너진 것에 비겼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관련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