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30년간 수집한 이경호씨
LP보다 소리 원형 가까워 매력
지난달엔 가이드북도 펴내
유성기 음반이 상할까 봐 평소에 이경호 대표는 MP3로 녹음한 음원을 듣는다. “귀한 손님이 틀어 달라고 요청하면” 2장 갖고 있는 앨범을 한 번씩 튼다고. 인터뷰 당일 큰맘 먹고 황정자의 ‘처녀뱃사공’을 틀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i.com

‘사의 찬미’의 윤심덕부터 베를린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까지 일제강점기 유명 인사의 육성이 궁금하면 이 사람을 찾아가면 된다. 전기절연물 생산업체 스웨코의 이경호(64) 대표다. 1980년대 후반부터 30년간 1920~1960년대 고음반을 수집해 개인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인 2,000여장의 유성기 음반(SP·Standard Play)을 갖고 있다. 단순 수집에 그치지 않고 각 음반의 역사적 가치를 평하고 노래 가사를 일일이 확인하는 작업도 ‘취미 삼아’ 해 왔다. 이씨가 대중음악 평론가들과 한 포털사이트 지식백과 ‘한국대중가요앨범’ 필진에 참여하게 된 배경이다. 지난달 이 음반들을 토대로 대중가요 역사를 정리한 ‘대중가요 유성기 음반 가이드북’(안나푸르나 발행)을 펴냈다.

최근 서울 대치동 자택에서 만난 이 대표는 “유성기 음반의 매력은 LP보다 소리 원형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성기는 흔히 축음기라고도 하는데, 전축과는 완전히 다른 분야예요. 유성기는 기계, 전축은 전자 기기라 고치는 전문가도 다릅니다. 유성기는 (음반에 파인) 골소리를 확성기의 소리 고명에 의해서 확대시키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소리 왜곡이 녹음할 때 한 번만 되거든요. 반면 전축은 음반에 담을 때 한 번, 음반에서 재생될 때 또 한 번 두 번 왜곡을 거친 소리죠.”

물론 유성기는 “전축 이전 버전”이라 단점도 있다. 전축은 레코드의 골에 담긴 녹음 음악 정보를 미세한 다이아몬드 바늘로 수집하는데 반해, 유성기는 보다 크고 굵은 쇠바늘을 써서 음반을 재생할 때마다 음반 표면도 닳는다. 쇠바늘 역시 일명 ‘석판’으로 불리는 돌가루 입힌 음반 표면에 긁히기 때문에 한번 쓰고 버려야 한다. 소리 볼륨은 “유성기 뚜껑을 닫고 열어서” 조절한다.

이 대표가 이렇게 손 많이 가는 유성기 음반을 모으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짜 유성기’를 사면서부터다. 고등학생 시절 기계 고치고 만드는 동아리에서 처음 유성기를 접하게 된 그는 유학과 창업을 끝내고 회사가 자리를 잡을 무렵 ‘그때 시절’이 생각나 인도 바이어에게 유성기를 부탁했고, 그렇게 구입한 유성기와 함께 딸려 받은 외국 음반으로 20세기 음악사에 입문했다. 한데 “데코레이션용”으로 집안을 장식했던 그 유성기를 본 한 전문가가 “가짜”라고 판정하면서 “제대로 공부하자 마음먹으며 이 길로 돌아서게” 됐단다. “진품(유성기) 사고 한국 음반 없을까 하고 알아보니 황학동 벼룩시장에 많더라고요. 그때 많이 산 음반 중 하나가 채규엽의 음반이었는데, 노래가 참 좋은데 아무도 이 이름을 몰라요. 알고 보니 일제시대 최고 유명한 가수인데 월북해서 아무도 몰랐던 거예요. 그런 점이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이 시대 음반을 보존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 수집을 시작한 거죠.”

초반에는 속고 산 앨범도 많았다. 그래도 ‘공부하는 셈’ 치고 꾸준히 모으니 좋은 앨범 들어오면 황학동 고물상들에게서 연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온라인 거래를 더 많이 하는 편이다. 이 대표는 “예전보다 음반 사기가 더 어려워졌다. 제가 갖고 있지 않는 음반이 희귀해지고, 제가 집으면 중요한가 보다 싶어 가격을 높게 부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 홈페이지를 만들어 음원을 공개하며 이준희 성공회대 교수, 배연형 판소리학회장, 장유정 단국대 교수 등 대중가요 연구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가 4년 전 ‘대중가요 LP 가이드북’을 쓸 때 관련 자료를 빌려 주면서 2탄 격인 ‘SP 가이드북’은 이 대표가 아예 쓰게 됐다. 책 구성과 집필은 물론 가사 채록, 음반 촬영까지 전부 담당하느라 쓰는 데만 꼬빡 2년이 넘게 걸렸다. 이 대표는 “책 쓰는 건 처음이라 완성되어 갈수록 ‘이것도 책이라고 쓰느냐’는 말 들을까 봐 스트레스 받았다”면서도 “저 아니면 못 썼을 책”이라고 자부심을 보였다. 듣고 있던 김영훈 안나푸르나 대표가 “이 책 발매되자마자 김훈 작가가 ‘발로 뛰어 쓴 책’이라며 너무 좋아하더라”고 슬쩍 덧붙인다.

‘대중가요 유성기 음반 가이드북’에는 거래가 500만원 이상의 A등급부터 20만원 이하의 E등급까지 다섯 등급으로 소장 앨범을 구분해 소개한다. 한국 SP 중 가장 오래된 1923년 ‘학도가’는 당연히 A등급, 소설가 김훈의 아버지 김광주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 ‘아름다운 희생’의 OST 미스시에론의 ‘청춘행’(1933)은 D등급(20만~50만원 선)이다.

이 대표가 꼽은 ‘가장 중요한 앨범 베스트 3’는 윤심덕의 ‘파우스트노엘’(1926), 채규엽의 ‘마라손 제패가’(1936), 1958년 영화 ‘지옥화’의 주제가인 송민도의 ‘양공주아가씨’이다. ‘파우스트노엘’은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캐럴 음반이란 점에서, ‘마라손 제패가’는 손기정의 육성이 담겼다는 점에서, ‘양공주아가씨’는 음반 전체에 그림을 넣은 ‘픽처 디스크’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모두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설명이다. 10여년 전 수백만 원에 구입한 앨범은 이제 장당 1,000만원을 호가하지만 물론 팔 생각은 전혀 없다. “이난영 같은 일제강점기 가수들의 신인 시절 육성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으니 무엇보다 역사적 가치가 있죠. 민간 박물관이 많지만 장기 대여 형식으로 전시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좀 더 많은 분들이 유성기 음반의 가치를 엿볼 수 있게요.”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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