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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설거지의 이론과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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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설거지의 이론과 실천

입력
2018.03.04 19: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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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하고 남기면 ‘적폐’ 되는 설거지처럼

하지 않으면 후대의 고통 되는 일 있어

매듭 제대로 짓는게 ‘세대 간 정의’ 부합

먼저 설거지의 존재론. 설거지는 과정입니다. 인생이 한 순간의 이벤트가 아니듯, 설거지 역시 긴 취식 과정의 일부입니다. 요리의 시작은 쌀을 밥솥에 안치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요리의 시작은 장보기입니다. 식사의 끝은 디저트일까요? 아닙니다. 식사의 끝은 설거지입니다. 설거지의 끝은 식기를 헹구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싱크대의 물기를 닦고, 가스레인지의 얼룩을 닦고, 도마를 세워놓고, 수세미를 잘 마를 수 있는 위치에 놓을 때 비로소 설거지는 끝납니다. 마찬가지 이야기를 화장에 대해서도 할 수 있겠지요. 화장이란, 밑화장을 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화장품을 바를 수 있는 정도로 무난한 피부를 유지하고 자신의 피부톤과 어울리는 화장품을 갖추는 데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화장은 립스틱을 바르고 집을 나설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귀가해서 폼 클렌저로 세안할 때야 비로소 끝납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과정에 대한 고려 없이 결과만을 강조하곤 합니다. 적절한 상대를 소개시켜준 적도 없으면서, 어느 날 갑자기 결혼하라고 다그치기도 하고,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계적인 학자가 되라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설거지의 윤리학. 설거지는 밥을 하지 않은 사람이 하는 게 대체로 합리적입니다. 취식은 공동의 프로젝트입니다. 배우자가 요리를 만들었는데, 설거지는 하지 않고 엎드려서 팔만대장경을 필사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귀여운 미남도 그런 일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혹자의 삶이 지나치게 고생스럽다면, 누군가 설거지를 안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의 현대사는 19세기 유한계급 양반들이 게걸스럽게 먹고 남긴 설거지를 하느라 이토록 분주한 것이 아닐까요? 후대의 사람들이 자칫 설거지만 하며 인생을 보내지 않으려면, 각 세대는 자신의 설거지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세대 간의 정의(justice)입니다.

설거지의 문명론. 설거지는 귀찮은 일입니다. 설거지가 귀찮은 나머지 그냥 굶고 싶겠지요. 혹은 일회용 식기를 사서 그 때 그 때 쓰고 버리고 싶겠지요. 설거지를 한껏 미루다가 몰아서 하고 싶겠지요. 그러나 설거지를 너무 미루면, 집에 불을 지르고 싶어집니다. 문명은 귀찮음을 극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적폐”가 되도록 설거지를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매 끼니마다 설거지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식기는 음식 거치대가 아닙니다. 문명이냐 야만이냐는, 냉장고에서 반찬통 꺼내 그대로 먹느냐, 아니면 예쁜 접시에 덜어먹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화장을 하는 사람이 하지 않는 사람보다 부지런한 것처럼, 그릇을 많이 쓰는 이가 안 쓰는 이보다 부지런한 겁니다. 물론 문명생활의 대가는 엄청난 설거지거리입니다.

설거지의 인간론. 결혼은 연애의 업보이고, 자식은 부모의 업보이며, 설거지는 취식의 업보입니다. 설거지거리는 취식의 상태를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얼마나 깔끔하게 혹은 게걸스럽게 먹었느냐가 고스란히 설거지거리에 반영됩니다. 사실 인간 자체가 설거지거리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인간의 육체는 땀과 침과 피지를 분비하고, 각질과 군살을 만들어냅니다.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달이 멀다하고, 타성, 나쁜 습관, 부질없는 권력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냅니다. 그런 면에서 성장과 노화란 곧 썩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설거지 없이 깔끔하게 살아 있을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래서 고전에서는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뜻인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말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원래 고대 중국의 탕(湯)임금의 목욕통에 새겨져 있던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의 본뜻은 일단 잘 씻으라는 것, 즉 스스로의 설거지에 게으르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을까요? 잘 씻고 살기 바랍니다. 그러지 않으면 역사의 설거지거리로 전락하게 될 테니까.

끝으로 가장 중요한 한마디. 모든 설거지는 이론보다 실천이 중요합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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