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냉엄한 현실 일깨운 평창올림픽
핵 고도화가 북한 발목 잡는 자충수로
어떤 경우에도 비핵화 흔들려선 안돼

평창올림픽이 끝났다. ‘평화올림픽’이라는 모토에 걸맞게 남북 간에 많은 굵직한 대화가 오갔다. 밀물처럼 밀어닥친 북한 선수들과 회담 대표단이 모두 빠져나간 지금 약간의 공허함, 아쉬움을 느끼면서 올림픽이 우리에게 남긴 게 무엇일까 돌아보게 된다.

당장 손에 잡히는 건 없지만, 몇 가지 주목할 만한 건 있다. 우선 대북 압박의 효과를 확인한 점이다. 김정은이 임신까지 한 여동생을 특사로 보내고, 대남전략 책임자인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이 재차 방남하면서 대화 공세를 편 것은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미의 비핵화 공조가 변함 없는 상황에서 북한이 먼저 이렇게 대화에 적극성을 띤 것은 전례가 없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북한 경제가 악화하고 있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상황이고 보면 어떻게든 경제ㆍ외교적 고립국면을 타개해 보겠다는 절박한 몸짓으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북한이 우리측에 먼저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한 것도 그렇다. 정상회담이란 게 과거 우리 정부가 온갖 저자세로 통사정해야 했던 것임을 생각하면 격세지감마저 든다.

강력한 대북 경고 메시지도 발신됐다. 북한은 ‘자존심’을 굽히고 정상회담 카드까지 던졌음에도 우리 정부로부터 속 시원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여건 조성이 먼저”라며 다시 북한에 공을 넘긴 문재인 대통령의 말에 김정은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김정은의 시나리오는 이런 게 아니었을 것이다. 남한은 이제 자기네 편의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김정은이 느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번 올림픽은 의미가 있다.

상황이 이렇게 뒤바뀐 것은 무엇 때문일까. 역설적이지만 북핵 고도화가 되레 북한의 발목을 잡았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은은 핵ㆍ미사일 능력을 높일수록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으로 계산했을지 모르나 미국마저 막다른 구석으로 모는 강수가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간파하지 못했던 셈이다. 남북관계가 북미관계의 종속변수로 전락하고, 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남북대화의 모든 것을 일일이 재가 받아야 하는 듯한 희한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도 다 북핵 고도화가 근본 원인이다. 그런 북한이 이제 와서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고 있으니 한심할 따름이다.

우리 정부도 깨달은 게 있을 것이다. 남북관계에 대한 이제까지의 구태의연한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으로는 더 이상 국민의 지지를 얻기 힘들다는 점이다.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 과정의 논란은 말할 것도 없고, 올림픽 개막식 전날 북한 군 열병식에 대한 우리 당국자의 발언이 부른 역풍은 달라진 세태를 반영한다.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은 조명균 통일부장관이나 열병식 당론을 놓고 냉ㆍ온탕을 오간 여당의 행태는 두고두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잃은 것도 있다. 한층 긴장도가 높아진 한미관계다. 남북대화의 불씨를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는 문 대통령의 열망은 이해하지만, 미국에 비핵화 의지를 의심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이것이 남북관계의 부담으로 되돌아 오는 것은 매우 아쉽다. 마크 내퍼 주한 미국대사 대리는 며칠 전 이례적으로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비핵화라고 명확히 표명되지 않은 대화는 원치 않는다” “한미훈련 재연기는 없다”는 등의 강경발언을 쏟아냈다. “미국은 대화의 문턱을 낮춰야 한다”는 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대응이다. 대사가 주재국 정부에 반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은 외교관례상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미국의 비핵화 의지, 그리고 한미 안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그만큼 확고하다는 뜻이다.

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대북특사 파견 입장을 밝혔다. 정상회담 제의까지 받은 마당에 특사 파견은 일견 당연한 수순이다. 김정은이 전향적인 비핵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도록 온 국민이 하나된 의지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단, 엄중한 전제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비핵화라는 몸통이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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