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구조조정]

#1
금호타이어 자구안 또 한달 연기
‘일자리 정부’ 구조조정 원칙 실종
‘GM 철수’ 대응에도 타이밍 놓쳐
#2
청산가치 더 높은 STX, 성동조선
컨설팅 결과 본 뒤 운명 결정 ‘선회’
정치권-노조의 지원 요구만 봇물

정부는 지난해 12월 ‘새로운 기업구조조정 추진방향’을 발표했다. 부실기업을 구조조정할 때 금융 논리와 산업적 측면을 균형 있게 반영하고, 지역경제와 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지역사회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금융 논리를 앞세우다가 청산으로 귀결된 한진해운 사태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취지다. 금융위원회가 기업 구조조정을 주도했던 지난 정부와 달리 산업통상자원부를 구조조정 컨트롤타워로 세운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새 구조조정 원칙 아래에서 구조조정 해법은 오히려 복잡하게 꼬이고 있다. 기업 구조조정은 기본적으로 이해관계자의 고통 분담이 뒤따르는 작업인데, 정부가 ‘일자리 프레임’에 갇혀있다 보니 ‘기득권 철폐’ ‘손실 분담’과 같은 구조조정 원칙은 사라지고 대신 ‘지원’ ‘보호’와 같은 온정적 구호만 무성한 형국이다.

조선업 구조조정은 이러한 정책 난맥상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례다. 1일 정부와 국책은행에 따르면 정부는 이르면 이달 중 STX조선해양과 성동조선해양의 산업 경쟁력을 진단한 컨설팅 결과 보고서를 바탕으로 두 조선사의 구조조정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시장에서는 이들 회사를 청산하는 대신 회생시키는 방안이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두 회사는 사실상 청산 쪽으로 기운 상황이었다. 11월 발표된 회계법인의 실사보고서는 두 조선사 모두 청산가치가 존속가치보다 높다고 평가했다. 당시 채권단에선 두 회사의 상황을 볼 때 예견된 결말이란 얘기가 많았다. STX조선의 경우 지난해 7월 법정관리 졸업 결정 당시 채권단은 이례적으로 법원에 반대 의견을 냈을 정도다. 2010년부터 구조조정에 돌입했지만 여전히 완전자본잠식 상태인 성동조선 역시 회생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정부가 두 조선사에 대한 처분을 미룬 채 외부 컨설팅을 의뢰하면서 분위기는 급변했다. 정부는 “컨설팅 결과에 따라 구조조정 방안은 열려있다”는 입장이지만 시장은 정부 기조가 바뀐 것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올해 1월 초 문재인 대통령이 경남 거제의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를 찾아 “조선 경기가 곧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고 발언하면서 정부가 두 조선사를 연명시킬 거라는 관측은 한층 강화됐다.

정치권과 노조 또한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연일 정부의 추가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경남도당 주최로 열린 ‘중형조선소 정상화 방안’을 위한 간담회에서도 두 조선사 노사는 “회사 청산 땐 지역경제에 막대한 파급력을 미칠 수 있다”며 정부 지원을 요청했다. 간담회엔 기획재정부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관계자가 참석했다.

한국GM과 금호타이어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정부가 중심을 잃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산업은행등이 주도하는 금호타이어 채권단은 지난달 28일 금호타이어 차입금 만기를 1개월 더 연장해줬다. 법정관리까지 거론하며 노사의 자구계획안 합의를 압박하다가 노사가 기한을 이틀이나 넘겨, 그것도 채권단 성에 안 차는 합의안을 제시했는데도 또다시 시간을 준 것이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상황만 봐선 정리하는 게 맞지만 그에 따른 파급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 기한 연기에 ‘비(非) 경제적’ 고려가 작용했음을 시인했다.

한국GM은 정부가 구조조정 타이밍을 놓쳐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혔다는 지적이 나온다. 2대 주주인 산업은행이 한국GM 경영권에 관여할 수 있는 비토권(거부권) 보유 시한이 지난해 10월 만료되면서 한국GM의 철수설이 끊임없이 나왔지만, 정부는 지난달 GM이 군산공장 폐쇄를 선언하고 나서야 부랴부랴 해법 찾기에 나섰다.

경제 논리로만 보면 과감하게 메스를 대야 할 기업들이 차례로 구제될 조짐을 보이면서, 시장에서는 정부가 ‘금융과 산업을 균형 있게 고려한다’는 구조조정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무엇보다 ‘일자리 정부’를 자처해온 문재인정부가 부실 기업에 대해서도 무리하게 ‘고용 유지’ 논리를 적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오정근 건국대 교수는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으로 삼는 현 정부가 뒤늦게 대량 실업이 우려되는 구조조정 과제를 맞닥뜨리다 보니 부실기업도 지원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경제에 타격을 주는 악재를 피하려는 정치권의 조바심, 이런 상황을 이용하려는 노사의 계산 또한 ‘구조조정 실종’에 한몫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기업 구조조정은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얽힌 문제인 만큼 해법을 찾기 쉽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원칙대로 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대량 실업을 우려해 섣불리 공적자금을 넣을 경우 결국 그 부담이 다음 정권과 국민에게 전가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과 교수는 “GM 본사 입장에서 한국GM은 트렉스 등 경소형차를 만드는 글로벌 생산기지인 만큼, GM이 군산공장 이외 다른 공장 3곳을 모두 철수하기 쉽지 않을 뿐더러, 철수하려 해도 최소 2,3년이 걸린다”며 “정부가 그러한 GM의 수세적 상황을 역이용해 ‘너희도 노력 안하면 에누리 없다’는 원칙을 보여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부실기업 구조조정과 더불어 대체산업 육성에 힘써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GM과 같은 사태가 되풀이되는 걸 막으려면 정부가 부품산업 경쟁력을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올려 우리나라 기업이 하청업체로 전락하지 않도록 후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지나치게 산업 측면만 고려하면 제 발목을 잡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제언도 나온다. 오정근 교수는 “구조조정은 기본적으로 고통 분담을 전제로 피를 흘려야 하는 작업”이라며 “그런데도 정부가 구조조정 과정에서 일자리를 고려한다는 신호를 보내니까 정치권과 노조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정부가 지원을 하더라도 노사에 뼈를 깎는 고통분담을 요구해야 이를 바라보는 국민이 납득할 수 있다”며 “그렇지 않으면 정부의 구조조정이 결국 부실기업 직원의 임금 보전에 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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