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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사소한 것들 때문에 저무는… 보통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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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사소한 것들 때문에 저무는… 보통의 사랑

입력
2018.02.27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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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단편 엮은 단행본 출간

사랑하거나 이별 해본 사람들에게

사랑에 관한 보통의 질문 던져

만화를 공부해 본 적이 없어

볼펜으로 그린 뒤 디지털로 편집

‘평탄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예외 없이 장애물을 만난다. 영화 속 사랑은 거의 언제나 승리하지만, 현실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시들고 만다. 사랑이 저물 때의 서늘한 열감을 그린 웹툰 ‘이토록 보통의’(문학테라피)가 최근 단행본으로 나왔다. ‘다음 웹툰’에서 지난해 2월 25일 연재를 시작한지 1년 만에 조회수 5,450만회를 넘긴 히트작이다. 사랑해 본 사람과 이별해 본 사람, 사랑 중인 사람과 이별 중인 사람 모두가 열광한 덕분이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디지털만화규장각의 ‘2018년 올해에 주목할 만한 웹툰’에 선정됐다.

필명 ‘캐롯(Carrot)’을 쓰는 작가에겐 ‘웹툰계의 노희경’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그는 얼굴, 나이, 성별을 꽁꽁 숨긴다. 독자와 소통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스스로를 무성(無性)의 인공지능(AI) 로봇처럼 그린다. 25일 그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가 전달되기를 바라서예요. ‘작가가 그런 사람이니까 사랑을 그런 식으로 보는구나’라는 편견을 제거한 겁니다. 독자들이 제 정체를 각자 원하는 대로 상상하고 이메일을 보내 와요. 제가 어떤 사람이라고 기대하는지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는 게 흥미로워요.”

캐롯 작가가 그린 본인의 캐리커처. 그는 "무성, 무취, 무향의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했다.
캐롯 작가가 그린 본인의 캐리커처. 그는 "무성, 무취, 무향의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했다.

캐롯 작가는 만화를 공부한 적이 없다. 대학에서 광고디자인을 전공하고 광고회사에 ‘잠깐’ 다니다 2년 전 무작정 웹툰을 그리기 시작했다. “만화 작법을 몰라서 콘티도 없이 작업해요. 컴퓨터 프로그램을 쓰는 게 어색해서 종이에 모나미 펜으로 원화를 그린 뒤 디지털 편집을 하고요. 다른 작가들이 신기해하면 ‘제가 워낙 배운 게 없어서 그렇다’고 하죠(웃음). 영화는 좋아하지만 드라마 키드는 아니에요.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요. 사실 제 만화가 이렇게 잘 될 줄 몰랐어요. 얼떨떨해요.” ‘레진코믹스’에 연재하는 ‘삶은 토마토’도 그의 작품이다.

‘이토록 보통의’는 단편들을 엮은 옴니버스 웹툰이다. 책에 실린 세 편은 ‘네가 누구든 너를 사랑하겠다는 다짐’이 무너지는 과정들이다. 애인의 전 애인이 에이즈 환자였다는 걸 알게 됐을 때, 1년간 동거한 애인이 애인과 똑같이 만든 AI라는 걸 알게 됐을 때, 내 사랑을 특별하게 포장해 준 애인의 불행한 과거가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사랑은 서서히 증발한다. “너무 사소해서 울어버리기도 민망한 그런 것들이 때로는 모든 걸 무너뜨리기도 하는데 말이야.”(‘티타’의 대사) 남는 건 아프지도 않은 기억의 조각뿐. “아직도 욕실에서 흩어지는 티끌 먼지를 가만히 바라볼 때면 그가 떠오르고 그 역시 가끔 나를 떠올려 주기 바란다.”(‘무슨 말을 해도’의 대사)

캐롯 작가는 ‘사랑은 유리 같은 것’임을 확인하는 순간순간을 간결한 그림체로 통절하게 묘사한다. “작품 속 인물에게 닥치는 상황은 ‘보통’과는 거리가 멀죠. ‘이토록 보통의’라는 제목은 독자들에게 던진 질문이 보통의 것이라는 뜻이에요. 보통의 사람이 보통의 사랑을 할 때 마주하는, 예쁘지 않은 질문들이요. 극적 효과를 위해 극단적 설정을 한 거고요.”

‘이토록 보통의’는 19금 웹툰이다. ‘야하지 않은’ 베드신이 가끔 나온다. “진짜 사랑은 그다지 에로틱하지 않잖아요. 연재를 시작할 때 19금으로 하면 조회수에 손해를 본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자연스러움이 더 중요했어요. 현실의 연인들이 늘 옷을 갖춰 입고 대화하진 않죠. 여성 등장 인물의 가슴 크기가 현실과 가까워서 좋았다는 반응이 많아요(웃음).”

문화를 놓고 고급이니, 저급이니 따지는 건 촌스럽고도 부당하다. 그런데도 웹툰이 비주류 하위 문화 취급 받는 건 여전하다. 웹툰 작가의 삶은 어떨까. 캐롯 작가가 자아실현을 위해 가난한 삶을 택한 건 아닐까. “아니에요. 회사 다닐 때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여유로워요. 계약금과 원고료, 구독료, 광고료, 인세 등을 합하면 소득이 상당한 걸요. ‘이토록 보통의’ 중 한 편은 뮤지컬 제작사에 판권이 팔렸고요. 운이 좋은 거죠. 연재 초기엔 웹툰으로 소비되기엔 너무 심오한 내용이라는 평을 들었어요. 웹툰 독자들이 가볍고 자극적인 콘텐츠만 원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순수 문학이 할 일과 웹툰, 웹소설이 할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요.”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이토록 보통의

캐롯 지음

문학테라피 발행∙472쪽∙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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