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가 지난달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18에서 2세대 라이젠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다. AMD 제공

2014년 10월 미국 반도체 기업 AMD 이사회가 새로운 최고경영자(CEO)를 선임하자 실리콘밸리가 발칵 뒤집혔다. 그럴 만도 했다. 리사 수(Lisa Su) 신임 CEO는 AMD 45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CEO였고 실리콘밸리의 반도체 기업 전체를 따져도 처음이었다. 게다가 대만 출신 이민자에 당시 나이는 40대 중반이었다. AMD에 합류한 것도 3년이 채 되지 않았다.

외부 시선은 기대보다 우려가 압도적이었지만 지난해 AMD는 지긋지긋했던 적자를 털어내고 연간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아직 왕년의 영화를 완전히 되찾은 것은 아니어도 10년 가까이 추락만 거듭했던 AMD가 마침내 바닥을 찍고 반등의 발판을 만든 것은 분명하다. 리사 수 CEO의 경영 능력을 의심했던 편견도 어느새 감탄으로 바뀌었다.

침몰 직전 AMD를 짊어진 여성공학자

리사 수 CEO는 AMD가 설립된 해인 1969년 대만 남서부의 도시 타이난(臺南)에서 태어났다. 양친 모두 대만인으로, 그가 두살 때 미국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통계학자, 어머니는 회계사인 유복한 가정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망가진 리모트컨트롤 자동차를 분해하며 공학에 대한 관심을 키웠던 리사 수 CEO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전자공학과에 입학해 그곳에서 반도체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미국 반도체 기업 텍사스인스트루먼트를 거쳐 1995년부터 2007년까지 IBM 연구개발 부서에서 근무했다. IBM에서 일한 12년간 40편이 넘는 반도체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이처럼 탄탄한 학문적 성취를 거둔 그는 AMD CEO가 된 뒤에도 사내에서 여전히 ‘리사 수 박사’로 통한다. 일부 미국 언론 역시 그에 관한 기사를 쓸 때 CEO 대신 박사란 호칭을 사용하곤 한다.

리사 수 CEO는 성인이 된 이후 대부분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낸 공학자였다. 다만 IBM에 있을 때 전설적인 CEO 루이스 거스트너의 기술고문을 지내며 글로벌 기업의 경영을 간접 경험하기도 했다.

그는 2007년 프리스케일(2015년 NXP에 인수)로 옮긴 뒤에도 최고기술책임자(CTO)를 지냈지만 2012년 1월 AMD로 이직한 뒤에는 연구실을 박차고 나왔다. 글로벌 사업 담당 수석부사장을 맡았고 결국 회사의 경영을 책임지게 됐다.

CEO가 된 리사 수가 마주한 현실은 암울했다.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픽카드 등이 주력 제품인 AMD는 곧 침몰할 수도 있는 최악의 위기 한가운데에 있었다. 인텔의 유일한 경쟁자로 2000년대 중반까지 치열하게 점유율을 다퉜던 AMD는 2010년 이후 인텔 제품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저렴한 PC용 CPU나 만드는 그저 그런 회사로 전락했다. 한창때 40%에 이른 CPU 시장점유율은 10% 아래로 쪼그라들었고 주가는 5달러 아래에서 맴돌았다. 20여 년간 IBM에서 근무하다 레노버 미국법인 사장 등을 지낸 중량급 경영자 로리 리드 전 CEO도 AMD의 몰락을 막지 못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수천 명을 구조조정하고 허리띠를 졸랐지만, 리사 수 CEO가 취임한 해 AMD의 4분기 영업손실은 3억3,000만달러로 불어났다. 2015년 신용평가회사 무디스가 AMD를 투자부적격 기업으로 지정하자, 시장은 AMD가 조만간 망할 것으로 예측했다.

AMD가 지난해 3월 출시한 라이젠 브랜드 CPU 첫 제품. AMD 제공
최후의 무기 ‘라이젠’의 성공

절체절명의 상황에 구원투수로 등판한 리사 수 CEO는 AMD의 핵심 역량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바로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반도체였다. 인텔이 글로벌 CPU 시장을 휩쓸어 존재감은 미미해졌지만 AMD도 기술력에서는 결코 만만한 회사가 아니었다.

인텔의 하청업체로 출발한 AMD는 지난 2000년 처리속도 1G㎐의 벽을 최초로 뛰어넘은 CPU ‘애슬론’을 내놓았고, 2005년에는 서버용 듀얼 코어(핵심처리회로) CPU를 처음 선보였다. 여기에 자율주행차와 가상화폐 채굴 열풍으로 급부상한 그래픽처리장치(GPU)까지 만든다. CPU와 GPU를 모두 개발하는 유일한 반도체 기업인 데다 2011년에는 CPU와 GPU를 결합한 APU를 최초로 출시할 정도로 기술력이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그대로 남아 있는 게 무엇인지가 중요하다”며 임직원을 독려한 리사 수 CEO는 새로운 영역이 아닌 AMD를 벼랑 끝으로 몰아온 CPU에 다시 사활을 걸었다. 인텔의 고성능 CPU에 맞서기 위해 AMD가 2012년 개발에 착수한 ‘라이젠(Ryzen)’이다. 리사 수 CEO는 직접 엔지니어들과 소통하며 라이젠 개발을 지휘했고 지난해 3월 드디어 라이젠 브랜드를 붙인 첫 번째 CPU 라이젠7이 세상에 등장했다.

코어가 8개인 라이젠7은 인텔 8코어 CPU에 버금가는 성능을 갖췄지만 가격은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인텔에 몇 세대나 뒤처졌던 기술력을 단번에 따라잡은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시장을 독점한 인텔 CPU 이외에 선택지가 없었던 소비자들이 반응했다.

CPU 성능 테스트 업체 패스마크는 지난해 2분기 글로벌 CPU 시장에서 AMD의 점유율이 31%까지 급증한 것으로 추정했다. AMD가 지난 10년 동안 기록한 최고의 점유율이다.

AMD는 라이젠7을 선보인 뒤 한 두 달 간격을 두고 중급용 라이젠5와 입문용 라이젠3를 순차적으로 출시했고, 서버용과 노트북용 제품까지 잇따라 내놓았다. 이달에도 라이젠에 그래픽카드를 결합한 PC용 APU 2종을 출시했다.

AMD의 서버용 CPU는 글로벌 클라우드 1, 2위 기업인 아마존웹서비스와 마이크로소프트도 채택하기로 했다. 서버용 CPU 점유율이 1%가 안 됐던 AMD는 자신감을 회복했다. 올해는 5%, 내년에는 10%까지 점유율을 끌어올릴 것이란 업계 전망도 나온다.

라이젠의 성공으로 AMD는 지난해 2분기 영업이익 2,500만달러를 기록하며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3분기에는 가상화폐 채굴 열풍으로 GPU 인기까지 치솟으며 영업이익이 1억2,600만달러로 불었다. AMD는 지난해 연간 영업이익 2억400만달러를 기록하며 리사 수 CEO가 취임한 지 3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라이젠을 소개하는 리사 수 CEO. AMD 제공
큰 고비 넘었어도 불투명한 미래

뛰어난 공학자였던 리사 수 CEO의 경영 스타일은 기존 경영자들과는 결이 달랐다. 구조조정이나 인수합병(M&A)을 통한 급속한 체질 개선은 시도하지 않았다. 핵심 역량과 시장을 정확히 분석한 뒤 성공할 만한 기술에만 공격적으로 투자했다. “하룻밤 사이에 회사를 바꾸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명확한 길을 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하고 싶다”는 그의 말처럼 조급하지 않으면서도 목표 설정은 분명했다.

리사 수 CEO는 평소 소탈하고 친근한 성격이지만 할 말은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라이젠 신제품 출시나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같은 공식행사에서 발표할 때도 차분하지만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청바지와 티셔츠 같은 수수한 옷을 주로 입어 애플을 창업한 고 스티브 잡스에 비유되기도 한다.

리사 수 CEO는 자신만의 리더십으로 수렁에 빠져 다 죽어가던 AMD를 일단 뭍으로 끌어 올렸지만 위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IT산업의 주도권이 PC에서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한 모바일 기기로 넘어간 것은 CPU 기업에 치명적인 위협이다.

CPU는 전 세계에서 인텔과 AMD만 할 수 있는 반면, 스마트폰의 두뇌인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는 진입장벽이 낮다. CPU를 만들지 못하는 삼성전자 퀄컴 애플 등이 현재 AP에서는 앞서가고 있다.

지난해 말 구글 등의 보안전문가가 인텔 CPU의 결함을 발견하며 불거진 ‘인텔 CPU 게이트’도 잠재적 위협이다. CPU 구조가 달라 인텔만큼 영향을 받지는 않지만 AMP 역시 안전성을 더 끌어올려야 하는 과제가 생겼다. AMD는 우선 올해 출시 예정인 2세대 라이젠을 통해 보안 취약성을 완벽히 극복해야 한다. 또 인공지능(AI) 프로세서 등 기존 CPU 시장을 대신할 새로운 먹거리도 발굴해야 한다.

이런 AMD의 새로운 도전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반도체란 기본 틀 속에서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기술을 지향할 것이다. 적어도 리사 수 CEO가 재임하는 동안에는 말이다. CEO가 된 직후 그는 사내 메일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반도체 엔지니어를 시작했을 때 난 이 세상 모든 혁신의 중심에 있는 반도체와 사랑에 빠졌다."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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