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 찾아 일자리 유지 희망 준 文
한계산업 국가 지원 않겠다는 마크롱
두 정상의 주목되는 구조조정 인식차

다른 나라 잘난 점을 들어 우리나라 못난 점을 꼬집는 어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밥상머리에서 남의 집 잘난 자식 얘기라도 꺼낼라치면 철없는 아이들조차 얼굴을 붉히는 법이다. 그럼에도 문재인 대통령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고향 방문은 그 대조가 매우 선명한 데다, 함의(含意)도 예사롭지 않아 새삼 되짚어 보게 된다.

파이낸셜타임스 최근 사설은 지난해 프랑스 대선의 ‘중요한 순간들(key moments)’ 중 하나로 당시 마크롱 후보의 고향 방문을 꼽았다. 그의 고향은 프랑스 북서부 솜주(州)의 주도인 아미앵이다. 유럽의 대표적 고딕건물로 꼽히는 노트르담 성당이 자리한 이 도시는 중세 때부터 직물업 등으로 융성해 온 곳이다. 하지만 지난해 4월 마크롱이 대선후보로 방문했을 때, 그곳 월풀 공장 노동자들은 실업 위기로 잔뜩 격앙돼 있었다.

마크롱 방문 날, 강력한 경쟁자였던 극우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 후보가 재빨리 선수를 쳤다. 마크롱에 앞서 현지를 새치기 방문한 그는 공장을 폴란드로 이전하겠다는 미국 월풀 본사 방침에 낙담한 노동자 수백 명 앞에서 “(고용유지를 위해) 정부가 개입하겠다”고 약속해 큰 호응을 얻었다.

반면 마크롱은 고향 노동자들로부터 거센 야유를 받아야 했다. 그는 격앙된 노동자들 앞에서 애써 불편한 현실을 말하는 걸 피하지 않았다. 그는 “국가는 세계화에 따른 산업 여건의 변화로 위기를 맞는 한계기업의 보호자 역할을 더 이상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르펜 후보처럼 공장 문을 계속 열게 할 수는 없어도, 노동자들의 고용 상황이 보다 좋은 조건으로 마무리될 수 있도록 싸우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재인 대통령도 고향 경남 거제시를 다시 찾았다. 거제는 울산과 함께 우리 조선산업의 메카다.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 등 양대 기업 주력 조선소를 중심으로 도시 전체가 조선업 클러스터를 이루고 있지만 최근 수년간 계속된 불황과 실업 우려로 무겁게 가라앉은 상태다. 지난 1월 3일 올해 첫 산업 시찰지로 그곳 대우조선을 방문한 문 대통령은 노동자들에게 밝은 희망을 선사했다. 그는 야박했던 마크롱과 달리, “곧 조선 경기가 턴 어라운드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국내 조선업도) 재도약할 수 있다”며 조선업 지원 및 공공 발주계획 등을 발표해 노동자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문재인과 마크롱은 다르다. “프랑스는 과거 알제리 식민통치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마크롱의 발언은 문재인의 성향과 비슷하다. 하지만 ‘정의’를 핵심가치로 의식하며 살아온 변호사 출신 대통령과, 민간 금융가와 경제장관을 거치며 예리한 현실적 감각으로 무장한 청년 대통령의 정치 DNA는 현격히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과 프랑스의 경제상황처럼 상이한 두 사람의 정치적 DNA가 고향 노동자들 앞에서 ‘선(善)한 문재인’과 ‘악(惡)한 마크롱’을 연출했을 것이다.

그런데 ‘선’은 좋고, ‘악’은 나쁜 것일까? 세상은 종종 선악에 대한 우리의 섣부른 판단과는 달리 흘러간다. 그 후 아미앵 공장은 르펜 후보의 약속이 무색하게 폐쇄됐다. 그리고 마크롱 대통령 취임 후 새로운 투자자가 나타나 전기차 전지 제조공장으로 탈바꿈하면서 새로운 고용이 창출됐다. 세계화에 따른 국제분업체계의 격변을 냉정하게 수용한 마크롱의 선택이 구닥다리 월풀 공장을 미래형 축전지 공장으로 전환시킨 셈이 됐다.

대규모 정부 지원책을 가동해서라도 조선산업의 경쟁력과 일자리를 유지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처방을 ‘어리석은 선의’로 매도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실업 공포에 짓눌린 노동자들 앞에서 불확실한 희망을 말하는 대신, “더 이상 국가가 일자리를 보장할 수는 없다”고 배수진을 친 마크롱의 행동은 대중정치인으로서 극히 어려운 일이다. 파이낸셜타임스가 마크롱을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대통령”이라고 평가한 이유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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