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는 ‘피해’라는 뜻의 ‘샤덴(Schaden)’과 ‘환희’라는 뜻의 ‘프로이데(Freude)’가 합성된 단어다. 두 단어가 합쳐지면서 ‘타인의 불행은 꿀맛’이라는 감정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이 말에 상응하는 한국어는 남의 불행이나 곤경을 보고 즐거워하는 ‘고소하다’라는 형용사다. 이 감정을 향유하는 전래의 방식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노골적이고 공개적이 되었다. 참고로 이 형용사는 사투리라야 더 생동감 있다. 경상도 방언은 ‘꼬방시다’이고, 전라도 방언은 ‘꼬숩다’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본 바, 샤덴프로이데라는 단어는 2005년 즈음 처음으로 한국 신문 기사에 선을 보였으나 2016년이 되기까지 언론이나 칼럼니스트들에게 별로 활용되지 않았다. 신문 기사나 칼럼에 이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박근혜ㆍ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이후다.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못할 어마어마한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이 포승줄에 묶여 줄줄이 감옥으로 가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인 신분 상승감과 자기 위안을 만끽한 것 같다. 권력자들의 추락은 내 지위가 상승한 듯한 착시 효과를 낳고, 구차했던 내 인생을 위안해 준다.

아주 적절하게도 언론학자 김예란은 어느 칼럼에서 샤덴프로이데를 발산하는 것에 따르는 정치ㆍ사회적 비효용성과 반동성을 경계했다. 실패한 정치인에 대해 냉소하거나 조롱하는 식의 단순하고 표피적인 감정 표출이 탈신화화의 쾌감과 평등주의적 환상을 충족시켜 주기는 하지만, 고소함에서 오는 탈신화화와 평등주의가 실질적인 정치력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것 이상의 보다 정교하고 체계적인 사회적 실천이 연동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참기름 냄새로 진동하는 사회는 횡액을 맞는다.

사회심리학자 리처드 H. 스미스는 ’쌤통의 심리학-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은밀한 본성에 관하여’(현암사, 2015)에서 질투라는 기폭제와 만나게 될 때, 샤덴프로이데는 더 이상 수동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경고한다. “쌤통 심리는 관찰자의 행동도 유도할 수 있다. 쌤통 심리의 근원에 질투가 있으면 수동과 능동의 경계가 흐려진다. 남의 불행을 지켜보며 즐기다가 남의 불행을 바라게 되고, 그 다음엔 그 불행을 직접 유발하려는 의지가 생긴다.” 나치 시대의 평범한 독일인들이 유대인에게 가한 광기 어린 박해가 이런 경우에 속한다.

인간의 무의식 중에는 파괴 욕망(죽음 충동)이 있다. 하지만 무엇을 파괴한다는 것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파괴 욕망을 행사했던 만큼 거기에 맞는 제재 또는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강상중의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사계절,2017)에 따르면,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파괴 욕망을 적절히 순화시키게 된다. “이는 일상에서 샤덴프로이데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 무의식의 지배자인 파괴 욕망은 일상과 타협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의 불행이나 곤경을 보고 “꼴좋다!”라고 쾌재를 부르는 노선으로 살짝 방향을 수정했다. 이 노선의 장점은 인간의 파괴 욕망을 온전히 충족시키지만 불이익과 같은 부작용은 조금도 없는 데다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법조계에서 재점화된 ‘미투(Me Too)’ 운동이 본래의 진원지인 문학계를 강타하고 연극계로 번졌다. 샤덴프로이데에 약자들의 공분과 연대의 효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때 숭앙 받았던 명사들의 몰락을 고소해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면 현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잠시 위신이 추락한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평균 이상의 자원을 가졌다. 미투 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피해자를 구제하고 가해자에게 응분의 책임을 묻는 것이며, 이 운동을 계기로 여성에 대한 구조적 성폭력 기제 자체를 근절하는 데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남녀 차별적인 사회ㆍ문화ㆍ법률 등의 의식 구조와 제도가 심문되어야 하고, 그것들을 시정하려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 고소해하는 것보다 피해자들과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 먼저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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