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택 연극연출가가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연극계 미투 운동으로 밝혀진 자신의 성폭행과 성추행 등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안마받는 와중에 버젓이 회의까지
선생님의 ‘나쁜 손’ 공공연한 비밀
성폭력 묵인 침묵의 카르텔이 문제
‘발 붙이려면 입 다물어라’ 종용
연극계 폐단 아닌 우리 사회 치부

‘선생님’의 ‘나쁜 손’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선생님’이 안마, 발성 지도 등을 빌미로 극단 단원들의 신체를 상습적으로 만진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20년 만에야 수면 위로 떠올랐다. 동료 중 누군가는 성추행으로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선생님’의 권위는 누구도 꺾을 수 없어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할 수 없었다 했다. 이제라도 폐단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퍼져 나간 ‘미투(#MeTooㆍ나도 당했다)’운동으로 ‘선생님’은 고개를 숙였다.

국내 연극계의 새 경지를 개척했던 이윤택(66) 연극연출가가 자신이 이끌던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을 20년 가까이 상습 성추행 해왔다는 사실은 우리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하지만 이는 이윤택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는 목소리가 크다. 연출가의 예술세계에 대한 존경을 이유로 입을 닫아 버린 폐쇄적 집단, 여전히 남성 권위자 위주인 연극계의 구조적 원인도 간과할 수 없다.

이 연출가의 성폭력을 폭로하고 있는 피해자뿐 아니라, 이 연출가 자신도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이 그의 성추행 행위를 알고 있었다고 시인했다.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자신도 안마를 하던 중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면서도 이를 “성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다”고 말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는 “할 수 없다고 거부하면 더 이상의 요구가 없었기에 후배들 역시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을 줄 알았다”고 했다. 김해나라는 필명으로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A씨는 단원들이 이 연출가에게 안마를 하고 있으면 “10년 차 이상 된 선생님들이나 선배들은 회의를 하거나 스케줄을 묻고 나갔다”고 적었다. 안마가 성추행이 되는 건 순식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극단 구성원은 집단 불감증을 보였다. 이 연출가의 사과를 믿고 단원들에게 “혼자서 안마를 하러 가지 말라”는 지침만을 내렸을 뿐이었다.

성폭력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은 연출가 위주의 연극계 위계질서와 무관하지 않다. 이 연출가는 단순한 연출가가 아니라 극단의 대표이자 단원들의 스승이었다. 이 연출가의 성추행 사실을 처음 실명으로 폭로한 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는 “그 당시 그는 내가 속한 세상의 왕이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폭로자 추은경 극단 바보광대 대표는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내게 그곳(연희단거리패)은 큰 성 같았고 덤빌 수 없을 정도로 견고했으며 또 그곳이 아니면 넌 어디에서도 배우로 서지 못 할거라던 이샘(이윤택)의 말이 가슴에 콕 박혀 있었다”고 밝혔다.

연극은 협업을 바탕으로 한다. 학교에서부터 선후배, 스승과 제자로 얽힌 인적 관계가 현장으로 이어진다. 황이선 연출가는 18일 페이스북을 통해 2002년 대학 재학 시절 연극계 대가로 알려진 교수에게 성추행 당한 사실을 폭로했다. 당시 술자리에서 해당 교수의 옆자리는 성추행을 당할 수밖에 없는 자리였지만, 학생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다. 이제 막 극단 생활을 시작한 어린 연극인들도 “이 곳에 발 붙이고 있고 싶으면 조용히 하라”는 종용을 거스르기 어렵다. 임인자 연극 기획자는 “훌륭한 작품과 예술세계에 대한 존경이 개인에 대한 맹목적 존경으로 치환되면 구성원들의 방관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위계질서가 강력히 작용하는 연극계에서 권위의 상층부는 여전히 남성이 독점하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설유진(극단 907 대표) 연출가는 “기본적으로 연출가가 가진 힘에 의한 구조적 문제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남성이 가진 힘이 강하다”고 말했다. 신체 접촉과 같은 성폭력이 아니더라도, 술자리와 작업 중 이뤄지는 성희롱 정도는 웃어 넘길 줄 알아야 일 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이는 결국 연극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임인자 기획자는 “남성 중심의 한국 문화는 무대 위 연극 작품뿐 아니라 연극의 창작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며 “우리 스스로부터 성찰하고 바꿔나가야 폐단을 끊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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