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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대통령님, 뭐라도 좀 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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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대통령님, 뭐라도 좀 해봐요

입력
2018.02.20 14:18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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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4일 오후 미국 플로리다 주의 어떤 고등학교에서 한 퇴학생이 총기를 난사했다. 고등학생 17명이 사망했다. 석 달 전인 2017년 11월 5일 오전 미국 텍사스 주의 어느 작은 마을에 있는 교회에 예배 도중 괴한이 침입하여 총기를 난사했다. 마을 인구가 362명에 불과한데 이 가운데 26명이 사망했다. 이때부터 불과 한 달 전인 2017년 10월 2일 미국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 앞에서 콘서트가 열리고 있었다. 건너편 호텔 방에 있던 괴한이 관중석을 향해 총기를 난사했다. 콘서트를 즐기던 시민 58명이 죽었다.

‘미국’과 ‘총기 난사’라는 단어를 이용해 검색하면 첫 페이지에 뜨는 사건이다. 미국에서의 총기 난사 사건은 페이지로 넘어가도 끊이지 않고 나온다. 사실 미국 총기 난사 사건은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다. 최근 통계를 보면 아마 춘분이 오기 전에 미국에서는 총기 난사 사건이 또 발생할지도 모른다. (물론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도대체 미국에는 총이 몇 자루나 있기에 무차별 총격 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인가? 3억 2,000만 명의 미국인이 소유한 총기는 약 3억 자루. 갓난애부터 목사님과 신부님까지 모두 한 자루씩 가지고 있는 셈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총을 갖고 있지는 않다. 내가 아는 미국인 가운데 자기도 총이 있다고 자랑한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미국 국민의 22%가 총기를 소유하고 있다. 미국인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에게 총이 있다는 말이다.

미국인은 왜 총을 가지고 있을까? 총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즉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총을 소유한다. 그런데 지키려는 사람만 총이 있는 게 아니라 상대방도 총을 가지고 있다면 별로 안전한 상황이 아니다. 총이 없다면 주먹다짐으로 끝날 일이 총 싸움으로 이어지면 누군가는 죽어야 할 테니 말이다. ‘황야의 무법자’ 같은 영화나 ‘보난자’ 같은 드라마에서 숱하게 본 장면이다.

미국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별로 안전한 나라가 아니다. 게다가 2001년 911테러 때는 2,996명이 숨지기도 했다. 이후 조지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2011년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할 때까지 10년 이상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미국 본토에서의 테러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최근 10년 동안 미국 본토에서 테러로 숨진 사람은 71명.

사고가 아니라 테러로 71명이 죽었다면 분명히 적은 인원은 아니다. 하지만 같은 기간 동안 미국에서 총기 사고로 죽은 사람은 30만 2,000명이나 된다. 같은 기간 동안 미국에서 에이즈와 약물 중독으로 죽은 사람과 해외 전쟁에 참전하여 죽은 군인을 모두 합한 숫자보다 더 많다. 우리나라에서 35번째로 큰 도시의 전체 인구가 총을 맞고 사라진 셈이다.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테러가 발생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2015년 한 해만 봐도 미국인 약 2만 명이 총으로 자살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1만 2,492명 죽였다. 매일 90명이 총으로 죽었다. 자살자를 빼도 매일 34명이 총으로 죽임을 당했다. 동시에 4명 이상이 살해된 다중 난사 사건으로 죽은 사람은 2%. 인구가 40만이 넘는 미국 도시 가운데 2013년 이후 다중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곳은 단 한 곳뿐이다. 미국의 웬만한 도시에서는 최근 5년 동안 총기 난사 사건이 한 번이라도 일어났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총기 사고로 죽은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

총기 사고라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전체 피해자의 50퍼센트는 불과 6%에 불과한 흑인 남성이었으며, 12세 이하의 어린이도 756명이나 되었다.

미국에서는 총으로 죽을 확률이 자동차 사고로 죽을 확률과 비슷하다. 미국 본토는 항상 전쟁 상태다. 그런데 어디가 전장이고 누가 적인지 모른다. 총기 사건 사망자 대부분은 동네 술집, 침실, 주차장, 거리에서 총에 맞았다. 총을 쏘는 사람은 정신이상자, 성격파탄자, 테러분자가 아니라 평범한 보통 사람이다. 케이크를 나눠먹는 이웃이거나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이었다. 심지어 자기 아기일 수도 있다. 3세 이하의 유아에 의한 총기 발포 사고가 매주 한 건 이상 일어난다. 이건 사는 게 아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총기규제는 하지 못했다.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는 미국 수정헌법 제2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었으면 헌법도 바꾸어야 한다. 미국인들이 아직도 ‘황야의 무법자’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2월 16일 뉴욕포스트 제1면에는 “Mr. PRESIDENT, PLEASE ACT.”라는 커다란 제목이 실렸다. “대통령님, 뭐라도 좀 해봐요.”라는 말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일 수는 없다. 미국 시민 불쌍해서 못 봐주겠다. 평창에 온 미국시민들은 총 없이도 밤늦게 안전하게 다니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뭐라도 좀 하시라.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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