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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여 전, 한 시중은행 채용에 당시 금융당국 최고위급 인사의 아들이 신입행원으로 최종 선발됐다. 인ㆍ허가권을 가진 금융당국과 ‘상대적’ 약자인 금융회사의 관계로 짐작할 때 ‘특혜채용’이라는 뒷말이 나온 것은 당연했다. 이 은행에는 전ㆍ현 임원들의 자녀들도 이미 여럿 근무하고 있었다.

이 채용을 둘러싼 논란은 금세 사그라졌다. 은행은 ‘블라인드 채용’을 방어막으로 내세웠고, 자기 사람이 걸린 문제에 금융당국도 최근과는 달리 나서지 않았다. 특히 은행은 신입행원 선발 과정에서 부모의 직업은 물론 전공과 학점, 어학점수, 자격증 등 소위 ‘스펙’을 전혀 보지 않았다고 했다. 부모의 사회ㆍ경제적 지위를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채용방식인데, 삐딱한 눈으로 보지 말란 얘기였다. 청탁 문자 같은 ‘연기 뿜는 총’이 없는 한 ‘블라인드가 아닌(것 같은)데 블라인드가 아니다’고 외칠 순 없었다.

최근 금융당국과 정부에서 밝힌 은행과 공공기관의 채용비리 점검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은행들은 특혜를 줄 VIP 명단을 별도로 관리했고, 점수를 조작해 선발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면접에 면접위원으로 들어가 합격시키기도 했다. 공공기관의 경우 전체 1,190개 기관ㆍ단체 중 946개에서 무려 4,788개의 채용비리 의심 내용이 적발됐다. 기회는 불평등했고 과정 또한 불공정했으니, 결과가 정의로울 리 없었다. 능력 있는 흙수저들은 ‘돈과 빽(배경)’이 없어 자리를 내줘야 했다.

반칙과 특혜가 판치는 현실을 눈앞에서 재확인하면서도 놀랍진 않았다. 그간 숱하게 드러난 인사ㆍ채용비리에 무뎌진 탓일 게다. 정유라의 “돈도 실력”이라는 갑질 발언에 분노하면서도 일각에서는 이를 묵인해온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다만, 애초부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금수저들이 또다시 부모 덕으로 선망하는 직장까지 선점하는 ‘불공정 게임’을 현 정부가 어떻게 대처할지 기대했다. 어느 때보다 ‘공정’에 대한 갈증이 극심할 때 이를 해갈해줄 것으로 기대 받고 출범한 정부 아닌가.

정부가 내놓은 채용비리 후속대책은 기관 내 채용비리 연루자는 엄중 제재하고 부정합격자는 채용을 취소하는 것이 핵심이다. 최고경영자 해임도 포함된다.

이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는 이유는 비리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어서다. 채용비리는 대개 청탁자가 수행자보다 높은 지위에서 내리는 요구나 지시 혹은 압력을 통해 은밀하게 이뤄진다. 청탁자 상당수는 기관장, 최고경영진을 포함해 이들의 지위를 결정할 수 있는 정부 핵심 인사, 여당 정치인, 고위 관료 등 힘깨나 쓴다는 인사들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의 중소기업진흥공단 채용비리, 강원랜드 채용비리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공기업의 채용담당자들은 대부분 기소돼 단죄가 이뤄지고 있지만,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는 핵심 정치인들은 모르쇠인데다 의혹을 덮으려 하고 있다.

그 뿐인가. 최순실을 도왔다는 인사를 “임원으로 승진시키라”고 ‘누군가’가 하나은행 고위관계자에게 압력을 넣었는데, 그 ‘누군가’가 벌을 받는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우리은행 채용비리 사건은 전 행장을 포함해 은행 관계자 6명만 기소됐다. 그들의 책임도 적지 않지만 청탁하거나 지시한 ‘누군가'는 역시 드러나지 않고 있다.

상당수 공공기관장은 정권 낙하산 출신이고, 금융회사 최고경영진은 당국ㆍ소관 상임위원회의 통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기관장 스스로가 권력이기도 하지만 정권, 정치권으로부터의 청탁과 압력에 취약한 을이기도 한데, 정부 방안은 마치 ‘당신들이 청탁을 안 들어주면 비리가 없어진다’는 인식이다. 몸통(청탁자)에는 손도 못 대고 꼬리(수행자)만 자르겠다는 식이다. 드러나지 않은 몸통이 더 포악하고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막대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최순실 국정농단에서 경험하지 않았던가. 청탁 전화 한 통 만으로도 모든 걸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회가 공정한 사회다. 비리가 드러난 지금이 적기다.

이대혁 경제부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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