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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혼자 살고, 사실 술은 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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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혼자 살고, 사실 술은 세요”

입력
2018.02.13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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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원하 시인. 제주도에 사는 그가 최근 서울 세종로 한국일보를 찾았다. 그는 “돈 벌 기회와 의지할 친구들을 두고 제주도에 갔다. 대신 한 가지, 시를 얻어 왔다”고 했다. 류효진 기자
2018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원하 시인. 제주도에 사는 그가 최근 서울 세종로 한국일보를 찾았다. 그는 “돈 벌 기회와 의지할 친구들을 두고 제주도에 갔다. 대신 한 가지, 시를 얻어 왔다”고 했다. 류효진 기자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한 달만에

원고 청탁 쏟아지고 시집 제의도

미용실 스태프 보조 연기자 이력

“시? 짝사랑한 이가 시집 건네

스물다섯에야 진지하게 읽어봐”

“행복 따라다니며 살진 않을래요

시는 삶… 보고 겪은 것만 써요”

요즘 한국일보 문화부에는 ‘이원하씨’의 연락처를 묻는 전화가 ‘많이’ 걸려 온다. 2018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돼 12일로 등단 43일째가 된 이원하(29) 시인 말이다. 연초 문단 안팎에서 화제가 된 시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를 쓴 그이다. “유월의 제주/ 종다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

이 시인은 예의 없는 사람들이 ‘시다’라고 부르는, 미용실 스태프 출신이다. 1월 신춘문예 시상식에 참석한 문인들은 이 시인을 신기해했다. “단단하고 독특한 캐릭터가 이미 완성돼 있는 작가네.” 그는 이른바 ‘메이저’ 문학 출판사에서 벌써 시집 출간 제의를 받았다.

이 시인은 제주에 혼자 산다. 정말로 술도 약할까.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최근 이 시인을 만나 물었다. “사실은 술이 세요. 소주 두세 병 마시면 기분만 살짝 좋아져요.” 어쩐지 배신감이 든다. “시로 엄살을 부려 본 거예요. 지난해 5월 혼자 제주로 이사했는데 너무 힘들었거든요. 벌레가 너무 많아서요. 벌레 발 소리에 잠에서 깰 정도였어요.”

이 시인은 학창 시절 “멋있어 보이려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를 끼고 다녔을 뿐, 문학 소녀와 거리가 멀었다. 그는 시와 문학에 관한 한 학벌이 없다. 서울 연희미용고와 경기 용인 송담대 컬러리스트학과를 나와 미용실 스태프로 취업했다. 1년 만에 그만두고 집 근처 도서관에 2년간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주로 추리소설이었다. “어머니가 ‘서른 살까지는 마음대로 살아 보라’고 하셨어요. 대신 용돈은 안 주셔서 도서관으로 갔죠.”

도서관 다음은 연기학원이었다. 마지막 출연작인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 뒷모습이 조그맣게 나온다. 연기를 배우다 문학을 만났다. 짝사랑한 배우에게 박후기 시인의 시집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를 선물 받고서다. “스물 다섯살이었던 그때 처음 시를 진지하게 읽어 봤어요. 그 사람이 이병률 시인의 여행 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들고 다니길래 여행작가 아카데미에 등록했어요. 거기서 산문보다 시를 쓰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듣고 시 아카데미로 갔죠. 그 사람이 실존 인물인지 요정인지,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이원하 시인. 류효진기자
이원하 시인. 류효진기자

이 시인은 대학 문예창작과 출신들과 ‘다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풍부한 낯선 것들을 찾아” 제주 동쪽 하도리에 방을 얻었다. “제주도가 한국말 통하는 외국이라던데요(웃음).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며 시를 써요. 20대에 경험한 많은 것들이 쌓여 있다 시에 스며드는 것 같아요.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처도 그렇고요. 평범하게 살았다면 쓸 게 없었을 거예요. 백지에 물음표 하나 그려 놓고 앉아 있었겠죠.”

시인이 돼서 행복한지 물었다. “신춘문예에 당선돼서 얻은 건 여유예요. 그게 행복인지는 모르겠어요. 사람이 꼭 행복해야 하나요? 행복이 있긴 한가요? 사람들이 찾는다는 행복을 따라다니며 살진 않을래요. 삶에 만족하면 발전이 없을 테고요.” 시인의 ‘배고픈 삶’이 두려워서 웅크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요. 생각했으면 제주도에 가지 않았겠죠. 뭔가 결정하기 전에 생각하면 겁이 나잖아요? 그래서 생각을 안 하고 결정해 버려요. ‘죽으면 어쩔 수 없지, 시 쓰다 배고프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살아야죠. 제주에는 당근, 무, 귤이 길에 버려져 있어서 굶어 죽진 않을 것 같네요(웃음).”

이 시인은 첫 시집을 낼 때까지 외로움을 견디며 제주에 머물 작정이다. “도시로 돌아오면 시가 망할 것 같아요. 시로 쓸 색(色)이 없어서요. 저에게 시는 삶이에요. 보고 겪은 것만 시로 쓰거든요. 제가 걸어가지 않으면 시도 멈춰 버려요.”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박혜인 인턴기자(중앙대 정치국제학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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