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홀랜드(1928~2017)

모든 암이 작용하는 공통의 '기관'이 정신(심리)이다. 암에 걸려 불안하고 우울한 것과 암 환자의 우울증은 전혀 다르다는 데서 정신종양학이 탄생했다. 그 분과의 창시자 지미 홀랜드는 "암 환자에게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라고, 싸워 이겨야 한다고 계속 말하다보면 환자가 그런 말 때문에도 지칠 수 있다. 투병으로 힘겨워하는 이에게 또 다른 짐을 얹는 건 터무니없는 짓이다"라고 말했다. Memorial Sloan Kettering Cancer Center
# ‘암’ 편견과의 싸움
“살아있는 것만으로 다행”
“우울하고 불안한 것은 당연”
당시엔 편견 용어조차 없어
# 정신종양학 창시
1972년 암환자 정신진료 시작
1977년 정신종양학으로 명명
환자 권리 운동 덕에 쉽게 정착
# 환자 인권 가장 급진적 옹호
환자 가족ㆍ의료진까지 체크
“종양이 아니라 환자를 봐야”
죽기 이틀 전까지도 진료 ‘헌신’

정신종양학(Psycho-Oncology)은 암환자의 정서적 고통과 심리 이상 여부를 진단 치료하는 암통합진료의 한 분야로 1970년대 태동했다. 환자 불안과 우울증, 분노 등을 완화해 투병 중 삶의 질을 개선하자는 1차적인 목적이지만, 환자 및 보호자, 의료진의 심리적 건강성을 회복ㆍ유지시켜 투병 과정을 보다 능동적이고 원활하게 하자는 의미도 있다. 약물치료, 대화ㆍ상담 등 정신의학 분야의 일반적 치료와 방법 면에서 큰 차이가 없지만, 병인(病因)이자 투병의 조건인 난치 질환 치료와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점에서 암 보조의료의 한 분야로 부류된다.

정신종양학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암이 환자의 정신(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진단하고 개입하는 것과, 거꾸로 특정 태도나 행동이 환자 심리와 암 치료 및 생존율에 미치는 영향을 진단-평가하는 것이다.(그래서 PsychoSocio-Oncology라고도 한다.) 정신종양학은, 그 분야에 대한 섣부른 이해나 제한적 데이터에 근거한 폄하와 과대평가, 즉 심리 요인을 경시하거나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식으로 부풀리는 경향과도 싸우며 성장해왔다.

예컨대 1985년 11월 미국 뉴잉글랜드 의학저널이 정신종양학의 기능과 의미를 의심케 하는 보고서를 내면서 사회적 논란이 야기됐다. 미국의 대표적 종양전문병원인 뉴욕 메모리얼 슬로언-케팅(MSK) 암센터 정신의학과장 지미 홀랜드(Jimmie Holland)는 신문에 글을 기고, 정신치료 자체가 정신신경면역학적 기전을 통해 암환자 생존율을 향상시킨다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연구 초기 단계여서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고 전제한 뒤 이렇게 썼다. “암환자는 ‘나쁜’ 태도 때문에 스스로 명을 단축시킨다거나, 병을 잘 통제하려면 ‘좋은’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식으로 공격받곤 한다. 병과 싸워 이기겠다는 의지와 낙관주의가 환자 컨디션과 상황에 대한 통제력, 적절한 진료를 수행하는 데는 틀림 없이 도움이 된다. 하지만 병의 진전이 환자의 태도 때문이라고 몰아세우거나 스스로 자책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건 가난이나 범죄 등 사회적 문제에 적용하는 너무나 낯익은 이데올로기, 즉 해답을 못 찾을 때 희생자를 비난하는 관행의 답습일 뿐이다. 그런 식의 이해는 암환자와 가족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긴다. 용감하고 강한 환자도 싸움에 질 수 있다.”(NYT, 1985.11.26) 홀랜드는 감정과 호르몬, 면역기능의 상관도는 무척 도전적인 연구과제지만 아직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추론하기엔 이르다고 거듭 강조했다.

1972년 대학원 학생 둘과 함께 병원 귀퉁이에 방 하나를 얻어 암환자 정신진료를 시작한 이래 ‘정신종양학’이라는 이름을 짓고 진료와 연구를 병행, 암통합 지원진료의 어엿한 한 분야로 성장시켜온 주역이 지미 홀랜드였다. 그가 2017년 12월 24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외과술의 발전과 갓 등장한 화학요법의 성과로 1960년대 말 암 완치환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적이 아닌 의과학으로 암이 치유될 수 있다는 게 입증된 거였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암 공포를 걷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80년대의 AIDS가 그랬듯, 의과학적 난제와는 별개로, 암에 대한 공포와 낙인을 극복하는 것도 문제였다. 70년대만 해도 의사들이 환자에게 진단 결과를 직접 알려주는 경우가 드물었고, 일반인 중에는 암이 나병처럼 전염된다고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 암에 걸리면 직장을 잃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었다. 암은 예고된 죽음이었고, 죽기까지 고통과 고립과 소외 외에는 누릴 게 별로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홀랜드는 ‘The Human Side of Cancer’라는 책에서 그 무렵 택시를 타고 MSK암병원으로 가자고 했더니 기사가 놀라더라는 이야기, “거긴 빅씨(Big C, 암 투병 교사가 주인공인 TV 시리즈)’들이 있는 곳 아니냐”며 거부하더라는 경험을 소개했다.(medscape.com) 70년대 초 한 저명 여성이 NYT 칼럼 원고에 유방절제술을 받은 사실을 언급하자 편집자가 ‘breast 가슴’과 ‘cancer 암’이라는 낱말을 지면에 내보낼 수 없다며 “대신 흉곽 질환(disease of the chest wall)이라고 고치자”고 한 일도 있었다고 2009년 인터뷰에서 말했다.(cancernetwork.com) 암 생존율 증가와 투병 인사들의 잇따른 ‘커밍아웃’ 덕에 그런 인식은 점차 개선됐지만, 예후가 나쁜 암이나 폐암-흡연-나쁜 습관처럼, 자책 사유로 자동연상되곤 하는 일부 암에는 지금도 편견이 스며있다.

당시는 암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니 편견이니 하는 개념 자체가 없던 때였다. 암세포와 백병전을 치러야 했던 의사나 의과학자들은 스스로 너무 바쁘고 힘들어 환자의 고통과 힘겨움을 배려할 겨를이 없었다. 암 치료 부작용으로 성기능을 잃었다고 호소하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nyt, 1993.7.20)이란 답을 듣기 일쑤였고, 대다수가 “암에 걸렸으니 우울하고 불안하고 화나는 건 당연하다. 암만 나으면 기분도 나아질 것”이라고 여겼다.(womensvoicesforchange.org) 지미 홀랜드가 정신종양학의 간판을 건 게 1972년이었다.

지미 홀랜드는 1928년 4월 9일 텍사스 네바다(Nevada)라는 작은 마을에서 고교 중퇴 학력의 목화 농부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여자 아이에게 남자 아이 이름을 붙이는 게 그 곳 관행이어서 지미는 그의 본명. 주민들의 성 역할기대가 명확해서 여자 아이는 잘 해야 교사나 간호사, 아니면 주부였고, “내가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 미쳤냐는 듯 쳐다보던” 그런 마을이었다. 그는 주민들을 몽땅 보살피던 마을의 한 늙은 의사를 좋아해서, 텍사스 웨이코 베일러대를 거쳐 휴스턴의 베일러 의대 85명 동급생 중 여학생 3명 가운데 한 명으로 졸업했다. 세인트루이스와 보스턴의 병원을 돌며 인턴-레지던트로 일하던 50년대 초 그는 소아마비로 자고 나면 하반신이 마비되는 이들을 속절없이 보곤 했다고 한다. 백신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그는 그런 파국적 질병에 대처해가는 이들의 마음에 끌렸노라고 말했다. 9세 때 삼촌이 정신병원에 입원한 일, 27세 때 첫 남편을 자살로 잃은 일 등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도 했다.(NYT) 그 무렵 뉴욕의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로즈웰파크 메모리얼 암연구소에 근무하던 제임스 홀랜드(James Holland, 1925~)를 만나 56년 재혼했다. 부부는 뉴욕 버팔로에 살림을 차렸고, 지미는 뉴욕주립대 정신과서 강의(56~73년)하며 E.J메이어 메모리얼병원에서 파트타임 의사로 일했다. 부부에겐 6명의 자녀가 있었다.

암 등 말기 환자의 심리적 고통을 중시하고 환자의 판단을 치료 과정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정신종양학은 1970년대 환자권리운동의 순풍을 타고 성장했고, 거꾸로 환자 권리 신장과 삶의 질 개선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bostoncancersupport.org

암 화학요법의 권위자인 제임스는 70년대 ‘CALGB(Cancer and Leukemia Group B)’ 연구팀 리더로 일했다. CALGB는 백혈병, 림프종, 유방암, 폐암, 위암, 비뇨ㆍ생식기종양 등 6대 주요 암에 초점을 맞춰 해당 분야 연구진이 진료 프로토콜을 만들기 위해 50년대 구성된, 암 의료분야의 최고 전문가집단. 76년 미국국립암연구소(NCI)가 CALGB에 협진시스템을 구축하자는 제안을 하면서 의료진과 방사선팀 등이 막 합류하던 때였다. 지미-제임스 부부의 집에 모여 난상토론을 벌이곤 하던 그들에게 어느 날 지미가 불쑥 끼어들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환자들의 피를 살펴보고, 똥과 오줌까지 분석하면서 그들의 기분은 어떤지 왜 안 살펴보지?” 그 질문을 계기로 CALGB에 그가 합류했고, 77년 세계 최초로, 지미와 제자 두 명으로 구성된 암 정신의학팀이 MSK 신경과에 설립됐다. 정신(psycho)이란 명칭에 거부감을 느끼는 환자들이 많아 ‘distress’라는 용어를 썼다는 이야기, ‘스페셜 메디컬 클리닉’이란 간판 덕에 다시 말해 ‘스페셜’이어서 환자들의 거부감도 덜했다는 이야기(cancerletter.com), 종양정신학(Onco-Psychiatry) 등 명칭을 두고 고민하던 끝에 예산 얻는 데 유리할 것 같아 정신종양학으로 결정했다는 이야기(medpagetoday.com)…. 암에 걸려 슬픈 것과 암에 기인한 우울증은 전혀 다른 병증이라는 사실, 정신성 약물과 종양 약물의 상호작용과 효능, 부작용 연구…. 환자들의 데이터를 명함 크기 용지에 기록하는 것으로 시작된 그들의 연구가 정신종양학의 처음이었다. 그의 팀은 1996년 정신의료지원부라는 정식 부로 승격됐고, 이제(2009년 기준) 100여 명의 팀원이 함께 일한다.

정신종양학이 비교적 순탄하게 착상된 것은, 남편 제임스의 지원 덕도 있었지만, 탈권위의 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학자 엘리엇 프라이드슨(Eliot Freidson, 1923~2005)이 ‘Profession of Medicine 직업으로서의 의술’이란 책으로 의료인들의 신뢰성과 권위에 도전하고 나선 게 1970년이었다. 소비자권리운동의 특수한 장르로 환자권리운동도 시작했다. “의료 관계가 의사의 도덕적 동기에 의해 행해지는 선한 행위가 아니라 의사-환자의 계약에 의해 서비스와 금전을 주고받는 관계가 됐고, 의료윤리는 이 거래에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 됐다.”(대한의사학회지 ‘의사학’ 2002년 12월, 강신익의 글) 보건의료기본법이 규정하고 한국의 병원 가운데 처음으로 연세의료원이 96년 채택한 ‘환자권리장전’의 주요 항목 중 하나가 환자의 알 권리와 자기결정권이다. 질병상태 및 치료방법, 부작용과 예후 등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요구할 권리, 환자가 치료 방법에 대한 의사를 밝히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다. 지미의 ‘정신종양학’은 환자 인권을 가장 선진적이고도 급진적으로 옹호한 의료부문 중 하나였다. 지미와 그의 연구진은 정신적 고통 정도를 환자가 직접 1-10단계로 평가하는 심리증상(고통지수) 평가지를 작성ㆍ보급했고, 증상에 따른 디스트레스 관리 알고리즘과 권고안을 만들어 홍보했다. 환자뿐 아니라 환자 가족과 의료진도 그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게 근년의 암 임상실험 등에서 중시되는 ‘환자보고성과(Patient-Reported Outcomes)’의 원형이었다. 미국국립암연구소와 미국대학암학회는 2015년까지 산하 모든 암센터에 지미가 주도해 만든 ‘디스트레스 관리지침’과 적절한 정신진료 서비스 체제 구축을 의무화했다. 지미는 2003년 MSK에서 은퇴했지만, 숨지기 이틀 전까지도 환자를 보았다고 한다.

2015년 ‘캔서케어’ 인터뷰에서 그는, 지난 40여 년 사이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우리의 감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니 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게 있다. 두려움과 걱정. 환자와 가족의 마음이다.” 그는 좋은 의사는 “종양을 보는 의사가 아니라 환자(whole person)를 보는 의사여야 한다”고 말했고, 하버드 의대 프랜시스 피바디(Francis Peabody, 1881~1927)의 말처럼 “환자를 잘 보살피는 비결은 환자를 사랑하는 것(The secret of caring for the patient is caring for patient)”이라고도 했다.

그는 유년시절 마을의사가 들고 다니던 왕진가방과는 비교도 못할 만큼 요즘 의사들이 활용하는 의료장비는 차고 넘친다며 “가방이 커질수록, 해야 할 진단과 검사가 늘어날수록, 의사와 환자의 거리는 멀어지게 된다”고도 말했다. 그는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환자의 마음을 적절히 살펴줄 수 있는, 그 만큼의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선’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대형병원 의사들에겐 그의 저런 말이 상당한 디스트레스를 유발할지 모른다. “마음(mind)은 모든 암환자의 병세가 영향을 미치는 단 하나의 공통된 기관”이라는 멋진 말로 지미를 도운 것은, 가장 든든한 원군이자 동료였던 남편 제임스였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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