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얼마 전 돈키호테의 음식과 스페인여행에 관련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동안 돈키호테에 빠져 지내며 알게 된 것들을 얘기하는 자리였다. 작가가 음식에 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는 것. 소설 속 음식을 통해 당시의 문화와 사회를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강연을 마치고 질문을 받는데, 한 중년 여인이 물었다. 한 2만원대의 스페인 와인에서 추천해줄 만한 게 있을까요? 어어어 하다 말았다.

난감한 질문이었고 답도 못했지만, 그 심정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나 또한 그 정도의 가격대에 내 입맛에 딱 맞는 와인을 찾기 원하니까. 그래야 부담 없이 행복하게 자주 즐길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게 참 쉽지가 않다. 그 많은 포도품종과 생산지와 포도밭과 그에 따른 향과 맛과 풍미와… 내가 맛본 건 그야말로 새 발의 피.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기울여야 알 수 있을까.

처음 식당을 오픈 할 때, 각 업체에서 받은 스페인 와인 목록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말 많았다. 전문가들의 설명글에 도움을 받자 하니 더 기가 죽는다. 가죽 시가 체리 건초 버섯 자두 오크 초콜릿 구조 밸런스 강인 정열 철학. 아무래도 난 와인 마실 자격이 없나봐, 이런 걸 어찌 다. 어찌어찌해서 가격대와 품종과 지역을 배분해서 리스트를 작성했다지만, 와인을 추천해달라는 사람들 앞에서는 여전히 쩔쩔매는 편이다. 그 사람의 취향과 기호도 모른 채, 이걸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하면서. 그럴 땐 돈키호테의 산초가 부러워진다.

스페인 중남부 고원지대인 라만차 지역의 포도밭을 지나며, 어떤 술이든 냄새 한 번만 맡으면 그 포도주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맞힐 수 있던 산초를 떠올린다. 천운영 소설가 제공

산초 판사. 착하지만 머리가 약간 모자라는 배불뚝이 먹보 술고래. 이것이 산초 판사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다. 배불뚝이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신체적 특징이고, 먹는 것 밝히고 술을 좋아한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지만 술맛도 모르고 그냥 들이 붓는 술고래인 건 아니다. 술에 관해서라면, 술을 알아보는 것만큼은, 너무나 훌륭하고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니까. 어떤 술이든 냄새 한 번 맡는 걸로 산지가 어딘지, 포도품종이 무언지, 얼마나 오래된 술인지, 술통을 몇 번이나 바꿨는지, 그 포도주에 대한 모든 것을 딱 알아맞힐 수 있는 능력. 믿기 어렵지만 그렇다. 핏줄이 증명한다. 산초의 아버지 쪽으로 라만차에서 아주 유명한 포도주감정사가 두 분이나 계셨다니. 이 두 사람이 얼마나 유능했는지는 다음 일화로 알 수 있다.

한 보데가(술집)에서 두 사람에게 어떤 통에 든 포도주 감정을 부탁했다. 한 사람은 혀끝으로 맛을 보고 다른 사람은 코끝만 댔다. 첫 번째 사람은 쇠 맛이 난다고 말했고, 두 번째 사람은 양가죽 맛이 난다고 했다. 주인은 술통은 깨끗하며 쇠나 양가죽 맛이 날 리가 없다고 장담했다. 그래도 그 두 감정사들은 자기들이 한 말이 맞는다고 확신했다. 시간이 흐르고 술이 다 팔려 술통을 청소해 보니, 거기에서 양가죽 끈에 달린 조그마한 열쇠가 발견되었다.

스페인의 전통적인 와인 숙성 항아리. 어떤 와인이든 언제든 맛있게 마실 준비가 돼 있다면 수많은 와인 종류 중에서도 내 입맛에 딱 맞는 와인을 찾는 여정도 즐겁지 않을까. 천운영 소설가 제공

나 이런 혈통을 가진 사람. 그야말로 물려받은 혓바닥 타고난 콧구멍이란 얘기 아닌가. 부럽다 산초, 자랑할 만하다. 그런데 산초가 더 마음에 드는 건, 어떤 와인이든 언제나 맛있게 즐겁게 마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목동들이 직접 담근 투박한 와인이든 가죽부대에 담긴 강화와인이든, 감사히 즐겁게 마신다. 산초의 타고난 혀는 와인을 감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지에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고향의 와인을 알아보고 반가워하기 위해 있는 것 같다.

누구나 와인전문가가 될 수는 없다. 누군가는 라벨 디자인을 보고 예측하고, 누군가는 좋아하는 품종에 충성하고, 누군가는 전문가가 매긴 점수를 신뢰하고, 또 누군가는 비싼 값을 하는 게 와인이라는 믿음으로, 저마다의 방식을 가지고 와인을 선택하고 즐긴다. 나는 그냥 되는대로 일단 마시는 중이다. 가끔 내 혀에 쩍 달라붙는 맛이 나오는 걸 반가워하면서. 그곳이 내 고향인 거 같다고 생각하면서.

소설가

인기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라이프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