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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여성은 세계의 정회원이다

입력
2018.02.06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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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고위 간부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가 4일 저녁 검찰의 진상조사단이 설치된 서울동부지검에 출석해 조사를 마치고 나서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법무부 고위 간부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가 4일 저녁 검찰의 진상조사단이 설치된 서울동부지검에 출석해 조사를 마치고 나서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서지현 검사가 검찰 고위간부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후 검찰 내 유사 사건들에 대한 익명 기사가 쏟아졌던 날. 눈과 귀를 더럽히는 추문의 쓰나미 속에서 단연 발군의 악행을 발견하고 그만 숨이 멎었다. “어느 젊은 여검사가 ‘너랑 자고 싶다’는 선배 검사의 성희롱을 듣고 상관에게 고충을 토로하러 갔다가 ‘나도 너랑 자고 싶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보도한 기사였다. 경고와 징계 절차로 사건을 해결해야 할 책임자가 되레 가담의 의지를 밝히는 대반전이라니, 이것은 호러 영화의 한 장면 아닌가. 왜 이 나라가 성범죄에 그토록 관대했는지, 성범죄가 성범죄로서 합당한 처벌을 받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다.

이런 추악한 일들이 검찰에서만 발생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누가 감히 내게 죄를 묻겠냐’는 무소불위의 검찰권력이 없을 뿐, 도처에 편재하는 젠더권력은 한국사회 곳곳에서 유사사건들을 끊임없이 제조해 낸다. 검찰처럼 독점적 기소권이 없어도 상관없다. 여자 부하 몸 좀 만졌기로서니, 같이 자고 싶어서 자고 싶다고 말 좀 했기로서니 ‘누가 감히 내게 죄를 묻겠나’. 성희롱과 성추행과 성폭행에 관한 한 이 남성들 사이엔 위계가 없다. 굳이 성폭력에만 국한할 것도 아니다. 그것이 씨앗이냐, 발아한 새싹이냐, 거대하게 자라난 독버섯이냐의 차이일 뿐, 여성을 세계의 정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한국 남성 다수에게 공통적이다. 계급과 직종과 빈부의 장벽을 넘어선 대동단결. 여성은 세계의 정회원이 아니니까. 여성은 최후의 식민지니까. 이 세계를 어찌할 것인가, 암담하고 무력하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 까닭은 그런 짓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법이 있고, 제도가 있고, 규정이 있지만, 무용지물일 때. 침묵의 지지자와 방관자와 비겁자들이 보고도 모른 척할 때. 그것은 순식간에 얼마든지 해도 되는 짓이 된다. 8년 전 상가의 그 자리에서 누군가 ‘그만하시죠’ 한 마디만 했었더라면, ‘당신이 지난밤 한 짓을 나는 알고 있다’는 메시지를 그 자리에 모인 사람 중 한두 명이라도 발신했다면, 사태가 이 지경으로 치달았을까. 모든 식물의 생장에는 그에 걸맞은 토양이 있다. 성폭력뿐 아니다. 학교폭력과 왕따, 일터 괴롭힘 모두 목격자의 윤리를 상실한 방관자들이 추행의 비옥한 토양을 빚어낸다. 방관은 동조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 하루 만에 그의 업무능력에 대한 검찰 내 폄하 발언이 줄을 이었다. 통영지청 발령이 인사상 불이익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지금 가장 궁금한 건 그날 추행의 현장에 함께 있었던 방관자들의 심경이건만, 후회의 토로 대신 들려온 게 피해자 헐뜯기였다. 나는 서지현 검사가 어떤 업무성과를 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여자들은 언제나 더 많이, 더 자주, 더 가혹하게 평가 받는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 여자를 세계의 정회원으로 인정하기 위한 기준은 말할 수 없이 까다롭다. 여성의 재능과 성과는 출시되자마자 감가상각이 적용되며, 여성은 겸손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성과를 과시해선 안 된다. 모든 성취에는 한계가 존재하지만, 이 한계는 여성의 성취에만 따박따박 붙어 다니며 성과보다 앞서 거론된다. 결혼을 하면 집안일에 얽매인 편중된 여자가 되고, 결혼을 안 하면 세상사를 모르는 편협한 여자가 된다. 그들에게 여성은 결여되고 훼손된 존재로서, 기껏해야 세계의 준회원으로서, ‘정상’으로 평가할 방법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것이 여성을 평가하는 세계의 기준이다.

여성을 세계의 정회원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왜 그렇게 많은 남성들에게 감수하기 힘든 일일까. ‘저 사람은 나와 똑같은 인간이다’ 여기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게 왜 어떤 남성들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나도 너랑 자고 싶다’는 상관의 말을 듣고 두 다리가 후들거렸을 그 젊은 여검사는 창백한 얼굴로 뒤돌아 나와 어디로 갔을까. 그는 자신이 검찰이라는 세계의 정회원이라고 느꼈을까.

박선영 기획취재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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