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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그 시대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 부모 세대에 품은 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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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그 시대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 부모 세대에 품은 애증

입력
2018.02.02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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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가 쓴 부모 자서전

미군 클럽으로 돈 모은 아버지

양공주 미장원 운영한 어머니

격동의 시대를 산 보통 사람들

그들의 ‘삶과의 타협’을 그려

경기 파주의 삼거리 노씨네 가족을 번영으로 이끌어줬던 레인보우 클럽 1호점, 2호점.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벌레의 시간들’을 견뎌내야 했다. 사계절 제공
경기 파주의 삼거리 노씨네 가족을 번영으로 이끌어줬던 레인보우 클럽 1호점, 2호점.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벌레의 시간들’을 견뎌내야 했다. 사계절 제공

“전방위적 통제기관의 연출 속에서 인생을 살아낸 사람들이 갖는 한계는 너무나 명백하다. ‘그들’이 물려준 과거의 질서를 생각할 때마다, 빨리 사라져야 할 그 질서가 희한한 방식으로 끈질기게 유지되는 상황에 절망할 때마다, 우리는 머릿속에서 ‘그들’에 대한 관념적 살해를 생각하곤 한다. 각자 자신의 부모는 장수하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생명의 단축을 기원하는 이 딜레마는 분명 하나의 증상이다. 이것은 현재의 자식세대가 풍토병처럼 앓고 있는 노이로제라는 증상이다.”

‘노이로제’ 시대다. 촛불’혁명’이라 추어올리기 여념 없으면서도 다들 알고 있다. 바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이 정부 또한 5년만 통치할 뿐이라는 것을. 계산 빠른 이는 벌써 4년 뒤를 내다볼 것이란 것쯤은.

유시민 작가가 팟캐스트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출연해 언급한 ‘진보 어용 지식인’이란 표현이 오랫동안 화제를 모은 것도 바로 이 노이로제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옛 것은 무너졌으나 새로운 것은 도래하지 않은 데 대한, 사라져야 마땅할 옛 것들이 끊임없이 나의 발목을 잡아채는데 대한 신경증.

사회학자 노명우의 ‘인생극장’은 아버지 노병욱(1924~2015), 어머니 김완숙(1936~2016)의 삶을 추적해가는 과정을 통해 이 노이로제 문제를 다루는, 아주 흥미로운 기록이다. 우리 엄마, 아빠는 안 그래요, 하는 식의 접근은 아니니 의심은 버려도 좋다. 저자 스스로도 부모님의 삶이 시대의 ‘특례(特例)’가 아니라 ‘범례(凡例)’라 부른다.

1964년 문화영화 '유쾌한 가족' 속 박정희 일가(왼쪽 사진)와 파주 삼거리 노씨네 가족. 가족은 똑같은 가족이었으나, 박정희 가족은 모든 가족에게 '유사 가족'으로 받아들여졌다. e영상역사관・사계절 제공
1964년 문화영화 '유쾌한 가족' 속 박정희 일가(왼쪽 사진)와 파주 삼거리 노씨네 가족. 가족은 똑같은 가족이었으나, 박정희 가족은 모든 가족에게 '유사 가족'으로 받아들여졌다. e영상역사관・사계절 제공

시대상황을 드러내는 영화, 소설 등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두텁고도 재미있게 쓰인 서술이지만, 뼈대만 추리자면 이렇다. 아버지는 “기쁨과 애정 표현은 드물고 서툴렀지만 분노는 결코 다스릴 필요가 없는” 그 시대 아버지였다. 어머니는 총명함을 타고 났으나 공부할 수 없었고 그 한을 아들에게서 대리 만족하려 든, 그 시대 어머니였다. 식민지, 한국전쟁, 박정희 시대를 이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아버지는 일제시대 만주에서 배운 사진 기술로 경기 양주군 캐나다 부대 앞에 사진관을 열었다. 캐나다 부대가 철수하자 파주의 미군부대로 옮겼다. 원조경제 시대, 아버지는 ‘달러 만지는 사나이’였다. 아버지는 미군을 상대하는 ‘레인보우 클럽’을 열었고, 어머니는 클럽을 드나드는 양색시들의 머리를 매만져주는 미장원을 열었다.

풍족했다. 아버지는 건물을 올렸고 ‘뽀마드’를 바르고 ‘라이방’을 꼈다. 어머니는 양색시 틈에서 돈을 벌면서 자신은 양색시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그 시절 구할 수 있었던 아주 좋은 한복을 입고 다녔다. 저자는 이를 ‘기지촌 모더니즘’이라 부른다. 한국전쟁의 충격을 소설로 형상화한, 박완서의 표현을 빌어 ‘벌레의 시간들’이라고도 부른다.

벌레들은 자신이 벌레인 게 너무 싫어 또 다른 벌레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그리고 벌레에서 해방될 수 있는 그 순간만을 기다린다. 노병욱-김완숙에게 그것은 “미국 박사”였다. 이승만 박사가 보여준, 그 미국 박사 말이다. 효과는 즉각적이다. 기대에 부응한 노명우가 미국은 아니지만 독일 박사가 되겠다는 계획을 밝히자, 김완숙은 클럽ㆍ미장원에 이어 운영하던 다방을 완전히 정리해버렸다. 그 시대 아버지 역할에 충실했던 노병욱은 생애 처음으로 김완숙에게 “당신 수고 많았다”는 말을 건넸다. 이제 드디어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시간이다. 그 나비가 노이로제에 시달릴 줄은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채.

인생극장

노명우 지음

사계절 발행ㆍ448쪽ㆍ1만7,800원

격동의 시대가 낳은 상흔에 대한 두터운 진술은 옷깃을 여미게 한다.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한길사) 3부작으로 널리 알려진 영국 좌파 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그렇다. 1990년대 토니 블레어 총리의 ‘제3의 길’을 지지하는 바람에 좌파들에게 격한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한번도 영국 노동당원이었던 적이 없다. 평생 영국 공산당 당적을 유지했다. 거의 아무런 존재감이 없었으며 소련 붕괴 뒤 자연 소멸한 그 공산당 말이다. 심지어 나중에 공개된 영국 정보부 비밀 사찰 자료에 따르면, 홉스봄은 기존 영국 공산당 지도부와 격렬한 갈등을 빚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묘한 불일치에 대해 홉스봄은 자서전 ‘미완의 시대’(민음사)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 세대가 보기엔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겠지만, 20세기 초 유럽을 휩쓴 파시스트의 군홧발을 목격한 자신만큼은 공산당을 절대 버릴 수 없었노라고. 공산당을 품은 홉스봄이 공산당을 넘어서는 방식이었다.

사회학자 노명우 또한 “자식 세대가 이전 세대를 감정적으로 미워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그 때 비로소 진짜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순간이 다가오지 않을까”라고 제안한다. 노이로제는, 증오로 해소되지 않는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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