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흔들 판사 동향파악, 청와대 커넥션
현행법 위반 내부조사로 가릴 수 없어
사법부, 국민 눈높이서 의혹 해소해야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와 시민고발단이 29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을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고발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사법 신뢰는 싸락눈 같다고 한다. 쉬이 쌓이지 않고 작은 미풍에도 흩날린다. 그래서 싸락눈이 많이 내려 쌓이길 기다리기보다는 미풍이라도 불지 않길 바라는 게 빠른 길이라고 김용담 전 대법관은 ‘바람 관리’를 주문했다. 사법부가 어렵게 쌓아온 신뢰를 훅하고 날려버릴 바람이 저만치 와 있다.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의혹,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이 굴릴수록 커지는 눈덩이다.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의 블랙리스트를 몰래 작성했다는 의혹이 지난해 제기된 이후 대법원은 두 차례 진상조사를 했다. 하지만 김명수 대법원장의 사법부가 사태를 헤쳐나갈 믿음을 주지 못하면서 위기는 반복되고 있다. 김 대법원장은 스스로 자신이 취임한 것 자체가 사법개혁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직은 재판만 해온 게 장점은 아닌 것 같다.

2차 조사결과도 예정보다 사흘이나 늦은 지난달 22일 발표하며 삐그덕거렸다. 언론에는 일문일답을 생략한 채 요약본을, 판사들에게는 전체 원본을 공개했다. 진실을 국민에게 알리고 싶은 게 아니었다. 발표에 앞서 서울 한남동 공관으로 평판사들을 불러 만찬을 연 것도 법원 먼저임을 보여준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항소심 판결선고 전후 청와대와 연락을 주고받은 정황, 법원행정처가 동향ㆍ성향 문건을 작성했다는 새 사실이 밝혀지긴 했다. 하지만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컴퓨터의 파일 760여 개는 확인하지 못한 채였다. 그날 밤 대법관 13명이 제기된 관련 의혹을 부인하고, 여론은 추가 의혹을 제기하는 상황에서 나온 김 대법원장의 행보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는 이틀 뒤 참담하다는 심경과 함께 추가조사를 예고했으나,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치를 내놓지 않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판사들에 대한 동향ㆍ성향 파악이 엄연한 범죄란 사실이다. 국정원의 주요인사 불법 사찰과 다를 게 없다. 개인정보보호법은 제23조에서 민감 정보, 고유 정보의 수집, 생성, 저장, 보유 등을 금지하고 있고, 제59조에서는 개인정보의 무단 취득 및 이용, 제공을 금지하고 있다. 위반하면 각각 징역 5년과 징역 3년까지 선고 받을 수 있다. 죄를 심판하는 법원이 법을 어긴 의혹을 덮고 갈 수는 없다. 대법원과 청와대의 커넥션, 재판이 정치적 흥정의 대상이 된 놀라운 상황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단순 범죄에 그치지 않는다.

사태의 엄중함에 비춰 김 대법원장이 검찰에 수사를 의뢰해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는 게 수순이다. 시민단체들이 법관 사찰의 책임을 물어 검찰에 양 전 대법원장을 고발했지만, 법원에서 압수영장을 발부 받아야 하는 검찰 자체의 수사를 기대하긴 어렵다. 물론 이 경우 김 대법원장은 판사들의 신뢰와 법원 내 입지가 흔들릴 수 있고, 강제 수사가 검ㆍ판 대립을 부를 가능성도 있다. 이런 점이 우려된다면 입법부 힘을 빌리는 방법이 있다. 국정조사를 통해 불법논란 없이 미공개 컴퓨터 파일을 들여다 볼 수 있고, 관련자를 강제로 소환해 증언대에 세울 수도 있다. 국정조사에서 걸러진 범죄사실만을 수사의뢰 한다면 김 대법원장으로선 부담을 덜 수 있다. 김 대법원장은 아직 내부 자체조사에 기대고 있는 듯하다. 판단의 기준은 법원조직이 아니라 의혹해소를 바라는 국민이어야 한다.

촛불 민주주의 2년 차이지만, 불편한 진실들은 남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의 민주주의는 북의 미사일보다 백배 천배 강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광장 민주주의와 현실 속 민주주의 사이의 괴리는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정치권에서 수구적 야당과 대결정치를 강화하는 여당에 대한 심판은 6월 지방선거에서 내려질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소환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선고 등 적폐청산의 큰 줄기도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로 가닥이 잡히고 있다. 그러나 사법부 문제는 의혹이 확산되는 초기 단계다. 어느 사회나 재판과 법원에 대한 신뢰는 최상위 가치이다. 법대로 재판하고 판결하는 것들이 쌓여 만들어진 게 사법 신뢰이고 사회를 지켜내는 법률 지배의 원리다. 의혹 해소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법 독립까지 흔들릴 수 있다.

이태규 뉴스1부문장 tg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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