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민석 교수의 성경 ‘속’ 이야기] <15>들판의 주검 위해 암소 목 꺾은 까닭

#1
복수 인정한 성경, 억울한 죽음 방지 위해
실수로 살인한 자 도피城으로 도망 허용
#2
가해자 알 수 없는 주검 발견 땐
주변 사람들이 도의적 책임 느끼게
인근 마을 암송아지를 희생제물로
#3
이태원 살인 진범 뒤늦은 처벌은
한국사회가 ‘울부짖음’ 계속한 결과
성서에 들어간 삽화. '도피성'으로 도망가는 자와 그를 들여보내는 장로를 묘사했다. 찰스 포스터 1897년 작품.

단번에 그 목을 꺾을 수가 있을 지가 걱정이다. 어르신들 손에 이끌려 성 밖으로 나간 암송아지는 아직도 뭘 몰라 큰 눈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드리기 위해 소를 자주 잡지만, 가끔씩 이런 일을 부탁 받으면 난감할 뿐이다. 도구를 사용하여 순식간에 죽여야 도살자도 덜 미안하고 죽는 소도 편할 텐데, 왜 구약성경의 법은 꼭 그 목을 꺾어 죽이라고 했을까? 물론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누구에게 살해되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주검이 들에서 발견될 때에는” 하나님의 이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신명기 21:1)

성경이 워낙 원시적인 시대에 기록되다 보니 별의별 이야기가 많다. 누구 하나 죽이는 것쯤은 글쎄. 집안의 가장이 패륜아를 즉결 처단하기도 하고, 심지어 인신제사를 드리기도 했던 시대였는데 말이다. 길에서 횡사한 이가 있다면 지금은 그 연고를 찾아 시신이라고 넘겨줄 텐데, 원시사회에는 그럴 수 있을 사회기구도 없었다. 미안한 얘기지만 당시에는 그냥 죽은 곳에 잘 묻어주기만 해도 되는 거 아니었을까?

피의 복수를 인정한 고대 이스라엘

죽음을 다루는 고대 이스라엘의 공동체 의식은 매우 또렷했다. 우선, 누군가가 내 가족이나 친족을 죽이면 법이고 뭐고 없다. ‘피의 복수’가 허락되었기 때문에 당장 달려가 용의자를 찾아 때려죽이면 되는 것이다. 역시 살벌한 원시적인 사회답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왠지 억울하게 맞아 죽는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워낙 원시적 사회라 그런지 하나님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으셨나 보다. 성경에는 그런 억울한 경우를 따로 명시해 두었다. “일찍이 미워한 일이 없는 이웃을 뜻하지 않게 죽였거나, 나무하러 숲 속으로 들어가서 나무를 찍다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나가 친구를 쳐서 죽었을 경우”(신명기 19:4-5) “몰래 숨어 있다가 무엇을 던지거나 한 것이 아니고, 잘못 보고 굴린 돌이 사람에게 맞아 그를 죽게”한 경우.(민수기 35:22-23) 지금의 법률에 비교하자면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그 원시적 사회에서도 사람의 억울한 죽음만큼은 이렇게까지 막으려고 했다. 마음 뭉클 할 정도다.

실제로 위와 같이 살인 사건의 억울한 용의자가 되었다고 해보자. 지금은 변호사부터 구해야겠지만, 그때는 제일 먼저 무엇부터 해야 했을까? 무조건 빨리 튀어야 한다. 죽은 자의 친족이 피의 보복을 하러 거품 물고 뛰어오기 때문이다. 튀되 반드시 하나님이 지정해둔 성소로 도망쳐서 제단을 붙들어야 한다. 아니면 ‘도피성’이라는 특수 보호 시설로 뛰어 들어가 그곳 어르신들에게 살려달라고 빌어야 한다. 전자는 지금으로 보자면 교회의 강대상을 붙들고 못나간다고 버티는 것과 같다. 후자는 예를 들어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은신처 같은 복지기관에 가서 그 곳 문을 두드리는 것과 같다.

복수심이 차올라 뭐든 다 쳐부술 기세다. 하지만 복지기관의 머리 희끗한 어르신이 자중하라고 호통 한번 치면, 일단 섣부른 보복 살해는 방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목사님이 손 붙들고 “형제님 일단 기도부터 합시다”라고 ‘김 빼기’ 작전을 펴면, 성급한 2차 살해는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발적인 사고를 방지하면, 도피성과 피해자가 살던 성읍의 어르신들끼리 만나 사건의 자초지종을 더 살핀다. 그리고 좀 더 전문적인 분석을 위해 법적 의회를 형성하고 사건을 판단한다. 고의적 살인으로 판단되면 살인자를 넘겨준다. 고의성이 없는 경우, 도피성의 제사장 시중을 들고 살면서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게 한다.

억울한 죽음을 없애려는 노력

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숙한 원시적 사회의 인권보호 흔적이지만, 그 정신만큼은 꿈틀거리는 것이 보인다. 100m 달리기를 30초에 뛰는 느림보를 위한 갸륵한 규정도 추가되어 있다. “도피성은, 그 곳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면 피살자의 친척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따라가서 죽일 터이니, 거리가 너무 멀어서는 안 됩니다.”(신명기 19:6-7) 사고는 종로에서 쳤는데 도피성이 모두 강남에만 있다면 불공평하다. 그래서 도피성을 최대한 골고루 분포하라는 사려 깊은 명령도 함께 있다. “내가 세 성읍을 따로 떼어 놓으라고 당신들에게 명령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시적 사회에서도 억울한 일만큼은 막으려고 이토록 노력하였다.

그런데 들판 위에 널브러진 주검은 너무 썰렁하다. 복수해주겠노라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형제도, 실수로 죽였으니 용서해 달라고 도망치는 이도 없이 그저 무관심이다. 아무도 이 죽음에 대해 소리지르지 않는다 하여도, 그렇게 죽은 자의 주검마저 침묵하는 것은 아니었다. 성경이 보고하는 인류 첫 살인의 사건을 보자. 마침 그 현장은 목격자 하나 없던 들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이렇게 소리치셨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창세기 4:10)

표현이 참 의미심장하다. ‘하늘’에서 내가 다 보고 있었다가 아니라 ‘땅’에서 피가 나에게 울부짖었다는 것이다. 한 생명의 억울한 죽음은 하늘의 문제, 종교적인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땅의 문제, 사회적인 것이다. 성경은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도 말한다. “이스라엘 안에서 죄 없는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만 당신들이 복을 받을 것입니다.”(신명기 19:13) 누군가에게 억울한 고통이 발생하면, 우리가 사는 사회는 복 받기 그른 것이다.

사회 일원 중 한 사람이 억울함을 당하면, 그 사회 전체가 마치 한 몸처럼 아파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끌려 나갈 암송아지는 주검이 발견된 곳에서 가장 가까운 성읍에서 가져오도록 되어 있다. 뚜렷이 책임질 일이 없다 하더라도, 그 주검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 도의적인 책임을 진 것이다. 목을 꺾어야 하기에 암송아지의 처절한 비명 소리는 짧지 않다. 꽤 오래도록 그 성읍사람들의 귀를 아프게 하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 다 같이 그 죽음에 숙연해 질 수 밖에 없다.

지난해 1월 20년 만에 붙잡힌 '이태원 살인 사건'의 진범 아더 존 패터슨에게 징역 20년 형이 확정된 뒤 피해자 어머니가 소감을 밝히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죽음에 대한 공감, 공동체의 뿌리

그 옛날 원시적이던 시대에도 성읍 밖 들판에 널브러진 시체 하나를 사사로이 여기지 않았다. 기차역 찬 바닥에 누웠다가 아침녘 몸을 일으키지 못한 어느 노숙인의 조용한 죽음이 있다. 그 죽음이 사회에 아무 아우성도 치지 못하고 뉴스에 뜨지도 못할 시시한 죽음처럼 보이지만, 성서는 이를 절대 간과하지 말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시한다. 그래서 동물 하나의 목이라도 꺾어 그 처절한 비명소리라도 대신 들리게 하였다. 그 죽음을 아무도 간과하지 않았다는 공동체의 ‘신의’를 그 조용한 생명에게 머리 숙여 표한 것이다. 공동체의 이런 행위는 놀라울 만한 사회적 결속을 만들어 낸다. 왜냐면 나도 어쩌면 그런 들판 위의 주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내 이웃은 간과하지 않고 같이 아파해 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힘없는 국민들이 좀 힘을 합해서 법도 바로 서게 하고 (대법원 판결까지) 같이 해줬으면 좋겠어요. 국민들에게 감사해요, 진짜...” (SBS 8시 뉴스; 2016년 1월 30일) 이태원 살인 사건의 피해자 조중필씨의 어머니가 했던 인터뷰다. 흉기로 9번이나 찔려 살해된 사건이 있었는데, 살해 목적은 그냥 ‘재미삼아’였다. 법이 대체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유력한 용의자는 지난 10여 년 동안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다행히도 우리 공동체는 울부짖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 20년 동안 지상파 방송에서 적어도 네 번 이상 이 사건을 다루었다.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결국 용의자를 미국으로부터 소환해 재판하였고, 사건의 진범은 그 죗값을 치르게 되었다.

그 청년의 억울한 피를 두고 땅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20년 동안 피와 함께 울부짖었다. 땅은 바로 나와 여러분이었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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