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다와 탕탕의 지금은 여행 중(90) 코타키나발루~반다르세리베가완 렌터카 여행④


스탬프투어도 아닌데...말레이와 브루나이 사이

에서 이어집니다.

예약한 숙소는 잘란베리비(Jalan Beribi) 지역이었다. 위치 감각이 전혀 없을 때 이 작은 나라도 크고 겁난다. 초소를 지키고 있는 경찰에게 물으니, 휴대폰 속 구글맵을 쓱 들이민다. “같이 가주면 안돼?” 종일 멍 때릴 듯한 표정으로 미루어 이미 답은 나왔다. 안면에 강철판을 깐 요구는 당연히 거절당했다. 카메라로 찍은 구글맵을 따라 일방통행로와 회전교차로에 실컷 농락당한 뒤, 현지인의 구글맵과 손가락질, 여행자의 육감을 더해 어찌어찌 숙소에 닿았다. 가히 기적이었다. 숙소 이름은 ‘바나나 홈스테이’. 지도 하나 갖춰져 있지 않고 직원은 영어와 친절에 무관심했다. 바나나처럼 미끄러진 우리의 하루. 이름 한번 참 기막혔다.

브루나이의 랜드마크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모스크

“브루나이에서 사는 건 좋은데… 좀 지루해. 따분하단 말이지.”

그 날 저녁 한 레스토랑에서 필리핀 이민자가 담배를 뻑뻑 피면서 한 얘기다. 담배는 말레이시아를 왕복하는 ‘좋은’ 친구로부터 쉽게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술도 마찬가지지만, 원가의 10배 가까운 가격을 부르는 ‘나쁜’ 친구만 있다는 투정이다. 귀동냥으로 아는 브루나이는 단순한 산유국이 아니다. 뭐든 돈 많은 왕조가 쏘는 것으로 유명하다. 현지인에게는 교육비도, 유학비도, 세금도 무료, 의료비도 1브루나이달러(B$, 약 800원) 이하다. 술탄(이슬람 국가의 왕)이 모든 권력과 부를 거머쥐고 독재 정치를 일삼아도 국민은 군소리할 처지가 못 된다. 아니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없으니 군소리도 못한다. 고혈을 짜는 고통이 없으니 좋긴 할 것이다. 그러나 여행자 입장에선? 미지와 환상에 가까웠던 브루나이의 이미지는 이곳을 두리번거릴수록 벽에 난 미세한 금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 나라만의 뭔가 ‘쌔끈한’ 것에 수시로 목이 탔다. 여행자 입장에선 맛이 ‘없거나 싱겁거나’다. 굳이 이 나라를 여행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반복됐다.

낮과 밤의 팔색조,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모스크의 24시
가교로 연결된 16세기 스타일의 왕실 선박과 함께 작품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밤의 모스크.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브루나이의 불빛이 반짝인다. 가늘던 빗발은 제법 굵어지고, 렌터카의 앞 유리를 물방울로 가득 수 놓았다. 귀소본능보다 강하게 가장 화려한 빛을 향해 차를 몰았다. 바로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모스크다. 민트 컬러의 조명을 쏘아 올린 미나렛(첨탑), 금으로 도배한 돔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제28대 술탄의 이름을 딴 이 모스크는 1958년 완공한 현대적 이슬람 사원이다. 조명에 아른거리는 모스크가 까만 거울 같은 인공호수에 비친다. 호수 위 다리는 놀 거리가 절대 부족한 브루나이인의 유흥을 책임지는 공원으로 유연하게 허리를 빼며 연결된다. 그래 봤자 야시장과 무지갯빛 조명의 산책길, 어린이용 자전거 대여소 정도. 이슬람교도의 기도는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반다르 세리 베가완에서 가장 높은 44m. 시내 어디에도 알라는 있나니.
출입 조건을 읽어보면 허용 사항이 하나도 없다. 여자는 일상복 출입이 안 되고, 아이는 제멋대로 놀게 하지 말란 소리 등등.
공원에서 바라본 모스크. 황금빛 외에는 색을 절제했기에 뿜어 나오는 고귀한 멋.

이런 밤 풍경과 달리 낮의 모스크는 새로움이다. 당시 건축비로 5백만 미국 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손때 하나 없이 절제된 외관에 맘이 훅 빼앗긴다. 시내 어디서든 보이는 이 밋밋한 랜드마크는 의외로 팔색조. 위아래, 좌우로 방향을 바꿀 때마다 다른 매력을 뿜는다. ‘여자이기에’ 준비된 히잡을 쓰고 내부를 쓱 훑었다. 문 앞에 기도자의 어지러운 슬리퍼 군단이 눈에 띌 뿐, 비이슬람교도에게 특별한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안보단 밖이 멋스럽다.

그나마 탱탱하네, 캄퐁아예르 vs 가동 야시장
시내행 택시 기사의 “탈래?” 신호는 검지손가락 돌리기. 승객은 택시를 휘파람 혹은 절규(특히 아이들)하며 부르기도 한다.
내 생애 가장 야만적인 헬스장. 이곳에도 섹시한 언니의 달력이 있었다.
길은 누군가의 마당이자 문이자 창문이다.
세상에서 얻어갈 건 인심밖에 없다는 사람을 여럿 만났다.

‘뭐 재밌는 게 없을까’하는 욕구에 강 맞은편 캄퐁아예르로 시선을 돌렸다. ‘동양의 베니스’라 했던가. 수상 가옥이 줄줄이 사탕이다. 강 근처로 다가가니, 한 사내가 자석처럼 끌려온다. “투어?” 브루나이에서 처음 만난 호객이다. 우기(9월~1월)인지라 더욱 혼탁해진 강 사이를 수상 택시가 연결한다. 거리에 따라 달라지나 편도 기본 가격은 0.50B$, 외국인이면 1B$다. 우리가 탄 택시 기사는 브루나이의 반갑고도 시끄러운 단면이었다. 호객꾼이든 택시기사든 수다스러운 투어는 수상마을을 겸한 맹그로브 구경이다.

“내 이름은 노크말, 노크말, 돈 워리, 돈 워리, 투마로우 오전 10시 이곳 투어할까? 아니다. 오전 11시가 좋겠어. 널 기다릴게.”

쇼킹 캄퐁아예르! 식사 전후에 봤다면, 고개 숙여 죄송합니다.

정신이 쏙 빠진 채 처음 닿은 곳은 캄퐁아예르 갤러리다. 이곳이 14세기부터 존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를 턱 내놓는다. 당시 낚시, 방직, 금공예 등으로 외국과의 교역도 있었는데, 30만원이면 수상가옥 거주권을 준다는 기사로 유명세를 탄 적 있다.

박물관 근처 신식 가옥 타운을 지나니, 겨우 지어 올린 목조주택이 고개를 내민다. 정신 단단히 챙기시라! 듬성듬성, 삐걱삐걱 판자 다리가 곧 길이다. 다리 한쪽이 빠질 몸 개그의 무대도 준비됐다. 처음엔 신통방통하다. 바짝 마른 근육과 기합이 아로새겨진 헬스장도, 특가 세일을 알리는 상점도 있다. 집 꾸미기 솜씨를 뽐낸 파스텔톤 가옥부터 보트에 밥을 주는 수상 주유소까지 마을다운 매무새는 제법 갖췄다. 현지인의 한 박자 빠른 인사에, 웃음꽃도 자주 피웠다.

그런데…, 몇 걸음 가지 않아 고통의 현장이다. 열악한 배수 시설로 찰랑거리는 배설물 위에서 잠을 자는 식인데다가, 바닥이 드러난 곳은 어김없이 쓰레기 하치장이다. 의식적으로 입으로 숨을 쉬었다. 30만원이면 된다고? 그 돈 주고 여기 살아달라고 빌어도 거부해야 할 실제 상황이다.

”1988년 이래 팬케이크(Kuih Malaya)만을 고집해 왔습니다.” 현지인이 더 줄 서는 집.
보통 1~2B$짜리 요기로 승부를 건다. 하나 둘 호기심에 먹다 보면 어느새 레스토랑 식사비.
그래도 브루나이가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 탱탱한 열기. ‘사든지 말든지’ 정신의 장사꾼 천지지만.

이에 반해 가동 야시장은 한 수 위다. 캄퐁아예르의 친절과 생기를 기본으로, 여행자의 군침까지 사로잡는 무대다. 주차장식 건물 아래 간편한 한 끼 식사, 군것질거리, 음료와 과일 등이 길게 상을 차렸다. 물론 매대에 가까이 가도 호객과 협상의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지만, 잠자던 브루나이의 생동감이 느껴진다. 각종 의성어와 의태어가 팔딱팔딱 뛴다. 소방차를 부를 수준의 바비큐 연기로 눈이 매워지고, 튀김 냄새로 식욕이 부글부글 끓는다. 브루나이식 팬케이크(Kuih Malaya)는 특히 추천. 보름달만한 폭신한 겉감 안에 땅콩과 설탕이 듬뿍, 단맛으로 입을 얼얼하게 만든다.

눈요기 호텔…브루나이 엠파이어호텔 & 컨트리클럽

앞서 말한 대로 우린 ‘안 가는 곳 전문’이기에, 날마다 넘쳐나는 시간을 브루나이의 동서남북에 소진했다. 하지만 브루나이에서는 퍽 재수가 없는 편이었다. 현지인이 추천한 나라의 허파, 울루템브롱 국립공원은 무함마드의 생일로 임시 공휴일이었다. 동쪽 외곽의 브루나이 박물관은 리모델링 관계로 무기한 휴무에 접어들었다. 그렇다면 국토의 75%를 차지하는 푸르디푸른 삼림을 봐주겠어! 패기 있게 반다르세리베가완에서 남동쪽으로 튀었다. 정글을 떠올리며 지도에도 제법 굵게 표기된 타섹메림분 공원(Tasek Merimbun)과 성가이리앙 공원(Sungai Liang Forest Recreation Park)을 친히 방문했지만, 기름값만 버린 꼴이었다. 테마파크가 있는 북동쪽의 제루동 공원은 어떤가. 인적 없이 깡통 소리만 났다(놀이기구 탑승료를 유료로 전환한 후의 사태란다). 인근 바닷가는 해변마다 쓰레기 밀물이었다.

비교는 죄악이지만 생각했다. ‘석촌호수가 100배 낫잖아!’ 유일한 특징은 호숫물이 검다는 것. 타섹메림분
새를 불법(?) 수집해온 공원 근방 가정집. 우리 눈에만 안 보이는 트로피컬 새가 브루나이에 상주함을 확인했다.

그나마 눈이 호강한 것은, 엠파이어호텔 & 컨트리클럽이다. 겉은 소박하나 속은 화려하다. 술탄을 칭송하는 로열리갈리아 박물관(Royal Regalia Museum)에서도 눈치챈 부티가 좔좔 흐른다. 기준을 알 길 없으나 5성급도 아닌 7성급이다. 샹들리에와 금, 대리석으로 장식한 인테리어, 숙면을 보장하는 침구와 엘레미스(고급 스파 브랜드) 어메니티, 워터파크 뺨치는 수영장, 골프장 및 영화관까지까지…. ‘엠파이어호텔이 곧 브루나이’라는 자부심이 넘쳤다. 해변에 밀려드는 쓰레기를 몽땅 건져낸 인부의 숨은 공로도 물개박수 감이다. 10인용 도미토리에서 달콤함을 꿈꾸는 배낭여행자에겐 눈요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게 문제. 패키지 골프투어를 온 한국인 그룹은 아마도 이곳 컨트리클럽에서 황홀한 라운딩에 젖어 들었을 것이다.

나는 새도 미끄러뜨린다는 7성급 호텔의 실내ㆍ외. 국빈 대접용으로 지어진 만큼 가짜 왕 노릇 한번!

글쎄다. 여행자 입장에선 부익부 빈익빈을 찌릿찌릿 느끼는 브루나이다. 고정관념을 부수는 풍경에 가슴 뛰고, 때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노동의 기쁨을 만끽하는 곳이 여행자에겐 진국이라고 배웠다. 그러므로 (받아주지도 않겠지만) 아쉬울 것 없는 복지 혜택을 바라고 브루나이 이민을 묻는다면 당연히 “No!”, 브루나이 여행을 추천하느냐고 묻는다면 “재고하길 바란다, 부디.”

강미승 여행 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관련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라이프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