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대담한 강연은 대공황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이루어졌다. 당시 영국 경제의 핵심 브레인이었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당시의 경제적 상황에 대하여 불안해하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자본주의의 미래에 관한 강연을 했다. ‘우리의 후손들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2년 후 출간된 이 강연에서, 케인스는 100년 후의 세상에 대해 두 개의 대담한 예언을 한다.

첫째, 우리의 경제적 수준은 최소 4배에서 8배 정도 성장할 것이며, 대부분의 경제적 필요가 해결될 것이다. 둘째, 따라서 노동시간은 하루 3시간 정도로 줄어들 것이고, 인간은 여가시간을 즐기는 좋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당대 최고의 경제 전문가답게 경제적 성장에 대한 그의 첫 번째 예측은 들어맞았다. 그의 예측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경제가 더 성장한 나라도 많다. 그러나 케인스가 생각한 100년 후인 2030년이 아직도 13년이나 남아 있지만, 그의 두 번째 예측이 들어맞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의 예측과는 달리, 우리는 여전히 하루의 3분의 1 이상을 일하는 데 쓰고 있으며, 앞으로도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세상은 살기 위해 일하는 곳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사는 세상으로 변했다. ‘죽고 나면 영원한 휴식이 있는데 지금 굳이 쉴 필요가 있는가’라는 승자의 미소를 주고받으며 사람들은 오늘도 일하기 위해 삶을 살아간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영화 제목을 비틀어본다면, 케인스가 살던 세상에서는 맞았을지 몰라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의 생각은 완벽하게 틀렸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버틸 수 있는 최후의 힘은 우리의 수고와 노동에서 발견해내는 ‘의미’이다. 우리의 모든 수고가 가족의 행복과 자녀의 성공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노동은 시지프스의 형벌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는 의미에 결사적이다. 모두가 ‘의미 있는 성공’에 집착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이룬 성공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기를 갈망한다. 교육과 장학 사업은 자수성가한 사람들에게 늘 매력적인 법이다.

그러나 의미란 대개 어떤 일의 끝자락에서야 찾아온다. 욕망이 생물학적이라면, 의미는 문화적이다. 욕망이 현재적이라면, 의미는 회고적이다. 욕망이 즉각적이라면, 의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긴 과정이다. 욕망과 달리 의미는 주로 시간의 마지막에 등장한다. 마치 책의 부록처럼. 죽기 직전에야 죄를 고백하고 예수를 따르기로 한 어느 강도의 경우처럼, 시간의 끝자락에서 발견되는 의미는 그 전까지의 쾌락과 욕망과 이기심을 용서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의미는 일하기 위해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히든카드이자 구원자인 셈이다.

성공의 끝자락에 부여하는 의미가 그간의 허물에 대하여 스스로 부여하는 심리적 면죄부가 아닌지 고민해봐야 한다. 의미 있는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인지, 자신이 이룬 성공을 의미 있게 만들려는 것인지 구분해봐야 한다. ‘굿라이프’(좋은 삶)는 의미 있는 성공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의미 있는 성공은 많을수록 좋다. 다만 의미 있는 성공에 앞서 ‘의미의 성공’을 가슴에 품고 살 것을 요구한다. 부의 성장이나 지위의 상승만이 아닌, 의미 자체의 성장, 의미 자체의 상승을 꾀해야 한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개같이 벌지 않는 삶의 가치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자기가 하는 일이 고작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래서 하루의 3분의 1을 보내는 일터에서 그 어떤 즐거움과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가 비록 자신의 직업에서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고 자신의 성공이 의미 있는 성공이었다고 자평하더라도, 그가 거둔 의미의 성공은 미미할지 모른다.

이런 생각에 대해 가진 자의 낭만적인 사치라고 냉소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을 단순히 환경미화원이 아니라 병원의 환자와 가족에게 위로와 행복을 주는 힐러(healer)라고 여겼던 어느 미화원의 경우처럼, 이런 생각이 직업의 종류와는 무관한 태도임을 연구는 잘 보여준다. 그 미화원이 비록 의미 있는 직업적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다하더라도, 그는 의미의 성공을 크게 거둔 사람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우주와 자연과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라는 소명을 들은 사람, 글자 그대로 신의 음성, 타인의 음성, 우주의 음성을 들은 사람은,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은 채로 오직 성공만을 위해 달리는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일 수 있다. 그들이 아무리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성공 추구를 의미 있는 성공이었다고 자평할지라도, 삶의 매 순간 의미의 성공을 꾀한 사람을 당할 수 없다.

올 한 해 의미 있는 성공의 잣대로만 우리를 볼 것이 아니다. 의미의 성공이라는 잣대로 우리를 살펴야 할 것이다. 우리 안에서 늘어나야 할 것은 수입과 집의 평수만이 아니라 의미의 크기이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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