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가상화폐 오프라인 거래소 코인원블록스에서 투자자들이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 시세를 지켜보고 있다.

정부가 최근 국내에 불어 닥친 가상화폐 열풍을 사실상 ‘투기’로 규정하고 거래소 폐지 등 고강도 규제를 시사한 가운데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 있다. 정부와 청와대가 ‘가상화폐’라는 단어를 쓰는 방식이다. 정부는 가상화폐 대신 ‘가상증표’라는 단어를 쓰며 화폐로서의 기능을 인정하지 않는 반면, 청와대는 ‘암호화폐’라는 단어를 쓰며 이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지난 11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가상화폐 거래소 폐지를 시사하면서 “가상화폐는 부정확한 표현”이라며 “가상증표로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현재의 가상화폐는 사실상 투기, 도박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 화폐로서 기능이 없다고 간주한 셈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박 장관의 거래소 폐지 발언에 투자자들이 들고 일어나자 같은 날 오후 “폐지는 확정된 게 아니다. 부처간 조율 뒤 최종 결정될 것”이라는 입장을 내고 수습에 나섰다. 그러면서 가상화폐 대신 암호화폐라는 단어를 썼다.

사실 가상화폐, 가상증표, 암호화폐 셋 다 틀린 말은 아니다. 넓게 보면 암호화폐가 가상화폐에 속한다는 해석도 있지만, 나라마다 가상화폐에 대한 정의가 들쑥날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각 차이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많다. 유럽중앙은행(ECB)는 2012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가상화폐를 “중앙 정부의 통제 없이 가상 커뮤니티에서 받아들여지는 전자화폐”로 규정하며 가상화폐를 실체적 존재로 인정했다. 하지만 이듬해 미국 재무부 산하 금융범죄단속반(FinCEN)은 “실제 돈의 반대말로, 법적 통화로서 어떠한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가상화폐를 평가절하했다.

정부와 청와대가 단어 사용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아직 국내에선 가상화폐에 대한 기준이나 정의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지난해 12월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가상화폐란 표현을 썼지만 최근엔 암호화폐를 사용하고 있다. 정부도 마찬가지 흐름을 보이다 최근 박 장관 발언을 이후로 가상증표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지난 11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법조기자단 간담회에서 가상화폐, 수사권 조정 등 현안과 관련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렇다 보니, 일각에서는 단어 선택 하나에도 가상화폐에 대한 정부와 청와대의 입장 차이가 드러난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정부는 최근 가상화폐 규제와 관련해 연일 공세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지난 1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관련 브리핑에서 “가상통화 거래규제와 관련해 정부는 기본적으로 우리 경제와 사회, 그리고 개개인이 입을 수 있는 손실을 예방하는 것이 목표”라며 “그 과정에서 비판도 있겠지만 욕을 먹더라도 정부는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서 박 장관의 거래소 폐쇄 발언 논란 때 “법무부 장관의 말은 부처간 조율된 말”이라며 지원 사격했던 11일에 이어 또다시 강력한 규제 의사를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정부와 달리 선출직인 대통령이 이끄는 청와대는 사안의 정치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 법무부ㆍ금융위 수준의 규제안을 쉽게 밀어붙이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가상화폐 투자자의 대다수는 문재인 대통령 핵심 지지층에 해당하는 20, 30대다. 단어 사용 하나로 큰 역풍에 휘말릴 가능성도 있다. 고강섭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청와대는 선출직인 ‘대통령’에 의한 정부라서 (특정 사안에 대해) 대중적 여론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며 “반면 정부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둘 사이 존재하는 시각 차이가 단어 선택의 차이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 교수는 “결국 청와대가 법무부를 통해 가상화폐와 관련한 여론을 살피고 (뒤늦게) 입장을 선회하는 ‘정치적 수사’를 선택한 걸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양원모 기자 ingodzo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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