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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진의 입기, 읽기] 레플리카의 유행 그 뒤엔 ‘스토리’가 있다

입력
2018.01.17 04:4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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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산 데님을 활용한 구찌의 레플리카 데님. 구찌 인터넷 홈페이지
일본산 데님을 활용한 구찌의 레플리카 데님. 구찌 인터넷 홈페이지

구찌나 발렌시아가 같은 고급 브랜드 청바지의 상품 설명을 보면 일본산 데님을 사용했다는 문구를 자주 볼 수 있다. 어떻게 하다가 청바지의 본고장인 미국이나 고품질 섬유로 유명한 이탈리아, 프랑스 같은 유럽 국가가 아니라 일본산 데님이 사용되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미국이 청바지 대량 생산 체제로 바뀌며 사라진 구형 청바지를 복원하는 브랜드가 일본 오사카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게 1980년대 말쯤이다. 왜 오사카였을까. 오사카는 미국 옷 구제 가게가 많고 인기도 많은 대도시였다. 또 근처 오카야마나 히로시마는 오랫동안 면 생산과 가공, 옷 제작의 중심지였고 봉제, 염색 등을 다루는 공장이 많아 청바지를 제작하고 판매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모양의 복원뿐이었겠지만 복각(레플리카)은 점점 더 치밀해졌다. 예전에 사용하던 데님 생산 기계, 구형 재봉틀이 다시 나왔고 봉제 방식, 염색 방식 등 사라졌던 공법을 복원하는 식으로 점점 더 치밀하게 나아갔다. 요즘 셀비지 데님이라고 하는 구형 청바지는 이렇게 모든 단계를 신경 쓰며 품을 많이 들여 제작하는 웰-크래프트 의류의 중심이 되었다.

청바지뿐이 아니었다. 20세기 초중반의 작업복이나 레저 웨어, 군용 의류 등도 복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옷들은 첨단 섬유에 비해 기능이 떨어지고 생긴 건 무뚝뚝하지만 기본 아이템이라 유행에 무관하다. 당시 기술로 환경을 극복해 보려는 지혜가 구석구석에 담겨 있기도 하다.

이런 옷은 소비자들에게도 구형 의류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디테일의 차이를 알아보지 못하면 괜히 비싼 옷일 뿐이다. 그래서 브랜드들은 어떻게 만들었고 이전 제품과 무엇이 다른지 잡지나 방송,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끊임없이 알렸다. 소비자들도 공부를 해가며 단추의 모양, 주머니 천의 재질, 사용된 실의 색상과 굵기 등 어지간한 눈매로는 알아차릴 수 없을 미세한 디테일을 포착해 냈다. 이렇게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를 자극하며 퀄리티를 올려갔다.

이렇게 해서 옷을 즐기는 새로운 방식이 등장했다. 보통 패션은 새로운 옷을 입어 보며 자신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보는 식이다. 반면 복각 청바지는 다들 비슷한 제품뿐이고 결국 옷 자체에 집중한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디테일은 어떤지를 확인하는 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또 잘 만들어진 옷인 만큼 오랜 기간 입으며 닳고 색이 바래는 변화도 옷이 만드는 재미의 일부다.

여러 부가효과도 생겨났다. 비싸게 잘 팔리니까 봉제 업체, 염색 업체 등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파고 들어갈 동기가 생겼다. 작은 회사들이 가진 약간씩 다른 노하우는 최종 제품에 담긴 개성이 되었다. 그리고 이 유행은 청바지의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 여러 브랜드들이 등장하게 된다. 노스캐롤라이나와 뉴욕 브룩클린 등 예전 봉제 공장이 있던 지역에도 오카야마와 비슷한 현상이 생겼다. 옛 숙련자들이 돌아오고 기술을 배우는 새로운 이들이 생겨났다.

일본 데님 브랜드 퓨어블루재팬(PBJ)의 청바지. 지퍼 대신 단추를 달아 '구형 느낌'을 살렸다. PBJ 인터넷 홈페이지
일본 데님 브랜드 퓨어블루재팬(PBJ)의 청바지. 지퍼 대신 단추를 달아 '구형 느낌'을 살렸다. PBJ 인터넷 홈페이지

이제는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오래된 공장들도 셀비지 데님이나 구식 원단을 다시 생산하고 있다. 한국에도 수입한 셀비지 원단으로 웰-크래프트를 표방한 청바지나 의류를 만드는 브랜드들이 있다.

물론 일본 데님의 경우 세계적 흐름에 잘 맞았고 지금의 선순환이 정착되기 까지 운도 따라 줬다. 그렇지만 꼭 청바지만 성공하라는 법은 없다. 서울에도 성수동의 구두, 봉제 공장 등의 전통이 있고 재활성화를 위해 많은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다. 대구의 섬유 산업이나 충남 공주 유구의 자카드, 경북 영주(풍기)의 인견(레이온) 등 지역 기반의 산업 들도 있다.

하지만 외국 사례에서 보듯, 생산자 혼자 어떻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저 잘 만드는 걸로 끝나지도 않는다. 옷 제작과 사용 등의 측면에서 유래와 배경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어야 한다. 이야기 자체가 옷과 마찬가지로 상품이기 때문이다. 시간도 많이 걸린다. 기반이 거의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던 일본산 데님도 복각을 시작해 세계적 흐름이 되기까지 30여 년이 필요했다. 하지만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 잘 만든 제품을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 이뤄지고 있는 시도들이 더 좋은 제품을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패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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