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 처리 방향에 대한 정부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양국간 문제가 해결될 뻔 한 적이 있었다. 1993년 일본 정부가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하는 고노 담화를 발표한 지 2년 뒤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이 설립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1인당 500만엔씩 지원을 추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어로 속죄금이라는 뜻의 쓰구나이킹(償い金)이 한국에서는 보상금으로 번역되면서 진정성 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일본 정부의 예산이 아닌 국민 모금을 통해 기금을 마련한 것은 일본이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돼 대상자 236명중 61명을 제외한 대다수 피해자들이 기금 수령을 거부했다.

양국간 위안부 문제가 가장 파국으로 치달은 것은 아베 신조 정부가 고노 담화의 발표 과정을 검증하겠다며 꾸린 TF를 통해 “고노 담화는 한일 양국간 외교적 타협의 산물”이라고 평가절하 하면서였다. 담화의 내용을 파기하지는 않겠다고 덧붙였지만 사실상 고노 담화의 무력화를 시도한 것이다.

최근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합의 검토 TF 보고서 발표에 이어 강경화 외교장관이 당시 합의가 진정한 해결은 아니라면서도 공식적인 파기나 재협상 요구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후속 조치로 일본 정부가 출연한 화해치유재단 기금 10억엔을 우리 정부 예산으로 충당하겠다고 했다. 양국간 외교적 파국을 회피하면서도 최소한 일본 정부의 돈은 받지 않겠다는 일부 피해자 할머니의 입장을 절충한 내용인 듯 하다.

그런데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 소녀상 이전 노력 등 누가 봐도 논란이 될 수 있는 항목을 두고, 굳이 10억엔을 언급한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외교가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베 총리는 첫 협상 때부터 일본 정부가 금전적 배상을 하는 것에 대해 크게 반대했다고 한다. 아시아평화기금이 일본 정부가 낸 돈이 아니라는 이유로 한국측에서 거부한 바 있듯, 일본 정부가 돈을 내는 것은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증거가 된다는 판단에서다. 반대로 한국측에서는 일본 정부가 마련한 기금만이 피해자에 대한 진정한 사죄가 될 수 있다는 논리로 접근했다. 당시 협상을 지켜보던 대다수의 전문가들도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중요한 근거로 정부 예산으로의 충당을 강조했다. 위안부 동원에 일본 정부의 간여는 없었다고 줄곧 주장해온 아베 총리가 법적 책임을 결코 언급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우회적 인정을 받아낸 의미인 것이다.

한사코 거부하던 아베 총리였지만 당시 누구보다 여성 인권에 관심이 많았던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등의 지원에 힘입은 바도 크다. 이후 일본은 살아있는 피해자 1인당 얼마를 지급하는 철저한 계산적인 방식을 택했지만, 한국측에서는 보다 상징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10억엔이라는 숫자를 제시했다고 한다. 금전적 배상보다는 일본의 법적 책임 인정에 무게 중심을 둔 것이다.

2년 남짓 지난 외교문서를 공개한 것을 두고 논란이 지속되고 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합의를 파기하지 않기로 한 것은 일단 잘한 일이다. 국가적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한들 상대방인 일본측이 응해줄 리 없고, 위안부 문제에서 절대적 우위에 있는 도덕성에도 흠이 될 수 있어서다.

한일 위안부 합의 과정을 둘러싼 논란이 적지 않지만 일본군 책임 인정, 일본 총리의 사죄와 반성, 일본 정부의 예산 출연 등 그간 한국측이 줄곧 주장한 3대 핵심 요소가 포함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당장 아베 총리가 이를 부인하는 듯 해도 합의내용은 뒤를 잇는 역대 총리에게도 지속적으로 유효하다.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향후 진정성을 담아 합의 내용을 언급하며 반성하는 일본 총리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적 여유를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한창만 지역사회부장 cm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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