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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대에는 5년 전인 2013년 의대설립추진본부가 설치됐다고 한다. 연구를 시작한 1996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의대 설립에 나선 건 20년도 더 됐다. 2014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오른팔이던 이정현 의원이 순천 곡성 보궐선거에 나서며 의대 유치를 공약으로 내걸었을 때 순천대 교직원과 학생들은 물론 지역 주민들은 환호했다. 그가 보수정당 후보로 처음 호남권에서 당선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늘을 나는 새도 잡을 수 있을 것 같던 이 의원이 공공의대 신설로 돌아서며 사실상 순천대 의대 설치 공약을 접었을 때 실감했다. 아, 정권 실세도 넘기 버거울 만큼 보이지 않는 벽은 높고 단단하구나.

그리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도 않은 서남대의 폐교가 뭇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건 49명의 의대 정원 때문이다. 의사가 될 수 있는 이 49장의 티켓을 쟁취하기 위해 대학들은 사활을 걸고 있다. 고작 50장도 안 되는 의사 행(行) 티켓이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는 건 희소성 때문이다. 의대 정원은 2006년 이후 10년 넘게 3,058명에 묶여 있다. 신규 티켓은 이미 오래 전 품절이 됐다는 얘기다. 어느 대학인가 의대를 새로 설립하려면 다른 대학의 의대 정원을 줄여서 만들어줘야 하고, 이렇게 ‘운 좋게’ 의대를 보유한 대학이 문을 닫아야만 나눠 먹을 정원이 생기는 구조다.

많다, 적다 늘 논란은 거셌지만, 의사 정원이 적다는 주장은 의사들의 많다는 주장에 번번이 밀렸다. 인구 1,000명당 임상의사 수가 한의사를 포함해도 2.2명(2015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꼴찌라는 통계도, 불과 2년 뒤인 2020년에는 의사 수가 1,800명이 부족할 거라는 수급 전망도 그들의 반발 앞에서는 꼬리를 내렸다.

설령 의사들 주장처럼 전체 의사 인력이 과잉 공급인 게 사실이라 쳐도, 외상외과 등 기피 진료과는 늘 인력이 부족하다는 건 의사들 스스로도 입 아프게 말하는 ‘팩트’다. 힘 들고 처우 나쁜 의료계의 ‘3D 진료과목’이어서라는데, 장담컨대 지금보다 인력 공급이 대폭 늘어난다면 넘치는 인력은 기피 진료과에도 흘러 들어갈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국종 아주대 교수가 호소하는 권역외상센터의 인력난도 전체 의사 인력이 늘어난다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의사 공급을 늘리면 의료의 질이 떨어진다는 그들의 주장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진입장벽을 쳐놓고 경쟁을 허용하지 않는 지금의 구조가 어쩌면 의료의 질을 더 낮추는 요인일지도 모른다. 정원을 늘리면 우수한 인재의 의대 쏠림 현상이 더 심해질 거란 우려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처음엔 그럴지 몰라도 그렇게 계속 공급이 늘어 경쟁이 치열해진다면. 인재들은 서서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엔 그렇게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작동한다. 대한민국의 똑똑한 인재들이 의료계 아닌 다른 곳에 골고루 퍼지는 것, 그건 나라를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비급여를 급여화해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는 이른바 ‘문재인 케어’가 시행되면 가뜩이나 어려운 의사들이 더 힘들어진다고 아우성이지만, 올 대입에서도 전국 의대들은 어김없이 상위권 학생들을 싹쓸이했다. ‘앓는 소리’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의사들이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먹고 살만한 직업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의사들이 오랜 기간 누려온 대한민국 최상위 엘리트 집단의 자리를 양보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절대적인 기준에서 힘든 것은 아닐 거라는 얘기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첫해인 지난해 비정규직을 비롯한 우리 사회 약자들의 이런 저런 요구들을 들어줬다. 그러나 언제까지 무조건 나눠주기만 하는 ‘인심 좋은’ 정부일 수만은 없다. 새해에는 그간 감히 손대지 못했던 기득권의 벽을 허무는 ‘독한’ 역할도 했으면 한다. 독한 역할이야 말로 어쩌면 진보정부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의대 정원 확대는 그 첫걸음일 수 있다.

이영태 정책사회부장 yt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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