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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가슴으로 쓴 편지] “비혼의 삶 녹록지 않아... 지혜로운 생활로 보람된 열매 맺길”

입력
2017.12.26 04:40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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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비혼으로 산 76세 할머니 김애순씨. 한국일보 자료사진
평생을 비혼으로 산 76세 할머니 김애순씨. 한국일보 자료사진

긴 세월 우정을 나눈 후배 숙영에게

스무 살, 갓 피어난 장미꽃처럼 아름답고 싱싱했던 너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세상 남성들이 저 여성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너의 비혼 결심을 그냥 지켜만 보았던 이유다. 그런데 오늘까지 비혼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숙영이 너는 그 긴 세월 동안 내 주위에서 내가 살아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1990년대 초 내가 창립했던 독신단체에 와서는 무료봉사도 했고, 그러면서도 너의 인생설계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구나. 비혼인 친언니와 함께 살아 가정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었겠으나, 너무 순진해서 사회생활에는 미숙한 면이 많았어. 때로 너에게 서슴없이 이야기했던 것은 비혼의 삶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너의 앞날이 염려되어 사회 선배로서 교훈을 주려 한 것이었는데 때로는 섭섭하게 느꼈겠지.

작년 하반기부터 상상도 못했던 정치 현상이 벌어졌다. 온 국민이 그랬겠지만, 특히 비혼 여성의 선두주자인 나로서는 허탈과 실망으로 평생 처음 정신적인 혼란과 분노를 겪지 않을 수 없었어. 비혼들에게는 부정과 비리가 쉽게 자리잡지 않을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깨고 비혼 여성 대통령이 국정을 농단한 거야. 가족이 없기에 나라의 곳간을 잘 지킬 것이라는 기대에서 대통령으로 뽑자고 주장했던 너와 많은 국민들이 실망해 펄펄 뛰던 모습들. 나는 처음부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비혼 여성의 한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한없이 추락했다. 너무 기가 막혀서 허공을 향해 헛웃음을 날렸던 것이 수 십 번도 넘는다. 비혼을 선택한 후배들에게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작년 한 해 동안만 해도 8,367건의 데이트 폭력이 발생했다고 한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 남모르게 일어난 사건은 쉽게 밖으로 밝힐 수 없는 일이기에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실제 상황은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찡하니 아파 온다. 그렇다고 사랑을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겠니? 사랑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고, 이를 인위적으로 억누르는 데서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기에 아름답게 사랑하기 위한 공부와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 ‘비혼이라 해도 건전한 사랑은 하라’고 했던 평소 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강력히 반대했던 어느 비혼 여선배의 반박을 데이트 폭력 기사가 나올 때마다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올해는 내게도 특별한 한 해로 기억하고 싶다. 3년 전 출간했던 책 ‘싱글들의 파라다이스’ 가 인연이 되어 한국일보에 비혼의 롤모델로 소개되고 덕분에 TV 프로그램 등에 등장하는 바람에 전국적인 인물로 부각됐다. 하지만 건강이 여의치 않아 계획했던 일을 하지 못해 못내 아쉬움만 가득하다. 내년에는 좀 더 적극적인 활동으로 비혼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려고 생각 중이다. 숙영 후배도 이 험난한 사회에서 보다 지혜로운 생활방식으로 노후대책에 매진하면서 네가 선택한 비혼 생활에 행복하고 보람된 열매를 맺기 바란다.

-76세 비혼주의자 김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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