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진실 밝힌 신학자 존 레인스

기독교 윤리를 전공한 신학자 존 레인스는 1971년 3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던 FBI 지국 비밀 문건을 털어 불법 공작의 진상을 폭로한 '절도범 8인'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사건 43년 만인 2014년에야 자신들이 ‘범인’이라 밝히며, 후버 체제 FBI의 조국과 2014년 NSA의 조국을 대비해 볼 것을, 민주국가 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되새겨볼 것을 요청했다. 2014년 다큐멘터리 '1971'에 출연한 존 레인스.

1971년 3월 8일 저녁, 미국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 특설링에서 열린 프로복싱 헤비급 챔프 조 프레이저와 도전자 무하마드 알리의 경기는 세계 10억 인구의 이목을 사로잡은 빅매치였다. 프레이저는 15라운드 접전 끝에 전설의 레프트훅으로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뒀다.

같은 시각, 경기장에서 불과 240km 남짓 떨어진 펜실베이니아 주 미디어(Media)시 FBI 지국에 절도범들이 잠입했다. 그들은 1,000여 건에 달하는 캐비닛 서류 일체를 훔쳐 도주했지만, 사건은 며칠 뒤 AP 등 통신사 바이라인을 단 단신기사로 몇몇 일간지에 실렸을 뿐, 별 주목을 끌지 못했다.

워싱턴포스트가 ‘FBI 감시 시민위원회’라는 유령단체가 보내온 FBI문건 내용을 1면 톱기사로 보도한 것은 3월 24일이었다. 반전ㆍ시민 인권운동을 저지하고, 주요 활동가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FBI가 자행해온 도청과 우편물 검열, 미행, 사생활 폭로, 협박 등 불법 공작 실태가 그렇게 폭로됐다. 당시 후버의 FBI는 주요 정치인의 사생활 사찰 정보를 쥐고 의회와 백악관조차 쥐고 흔들다시피 하던 ‘공포의 지배자’였다.

미국 시민은 그렇게 처음 물증으로 FBI의 진실을 확인했다. 주요 언론의 후속보도가 잇따랐고, 이듬해 6월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다. 미국 헌정사상 최초로 정보기관에 대한 의회 청문회와 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졌고, 일련의 개혁 조치가 단행됐다. FBI 종신국장 후버가 고혈압으로 쓰러진 것은 워터게이트 사건 한 달 전이었지만, 그의 체제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은 71년 3월의 저 사건부터였다. 정치평론가 크리스 위건트(Chris Weigant)의 2014년 칼럼 제목처럼, 에드워드 스노든의 ‘프리즘’ 폭로(2013) 이전에, 정보기관 활동실태를 조사한 미 상원 ‘처치위원회’(1975~76)와 워터게이트의 ‘딥 스로트’(1972), 데니얼 엘스버거의 베트남전쟁 이면 보고서(‘펜타곤 보고서’) 폭로(1971년 6월) 이전에, 저 ‘미디어 절도사건’이 있었다.

사건 직후 후버는 반전ㆍ인권운동의 거점이던 필라델피아에 정예요원 200여 명을 집중 투입해 대대적인 범인 추적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범인이 없으니 재판도 없었다. 워터게이트 등 잇따른 충격적인 사건들로 절도 사건은 잊혀갔다. 절도 공소시효(만 5년)를 넘기면서 FBI도 76년 3월 수사를 중단하고 기록 일체를 미제파일 속에 묻었다.

템플대 종교학과 사회윤리학 담당 교수 존 레인스(John Raines)가 FBI문건을 특종 보도한 워싱턴포스트 기자 베티 메즈거(Betty Medsger)를 식사에 초대한 것은 사건 18년 뒤인 1989년 초였다. 둘은 메즈거가 70년 1월 워싱턴포스트로 직장을 옮기기 전 ‘필라델피아 이브닝 불리틴’ 기자로 일하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날 식사를 마치고 담소를 나누던 중 존은 메즈거에게 12살 막내 딸을 소개하겠다며 부른 뒤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태어나기 전, 네 엄마와 나는 FBI에 대한 아주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됐단다. 우리는 그걸 미국의 모든 시민에게 알리고 싶었어. 그래서 베티에게 전해 주었지.”(WP, 2014.1.10) 메즈거도 딸도 그날 그렇게 제보자의 비밀,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됐다.

메즈거가 그 사실을 세상에 공개한 건 다시 25년이 흐른 뒤인 2014년 1월, ‘절도범들: 에드거 후버체제 FBI 비밀의 발견’이란 책을 통해서였다. 잊힌 사건의 전모와 의미, 절도 주역 8인의 진실과 삶이 그렇게 알려졌다. 에드워드 스노든이 국가안보국(NSA)의 시민 전방위 사찰을 폭로하고, 반역혐의로 기소돼 망명지를 떠돌던 때였다.

존 레인스와 71년의 동지들이 무덤까지 비밀을 갖고 가자던 43년 전 약속을 깨고 메즈거의 책 출간에 동의한 까닭은, 늦게나마 영웅이 되고자 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저 사건을 감행하던 무렵 각자가 감당했던 실존적 고민과 질문들, 상충하는 가치와 책임을 스노든 사건을 마주한 2014년의 세계와 미국 시민들에게 환기하고자 해서였다.

미디어 절도사건의 주역 중 한 명인 템플대 명예교수 존 레인스가 11월 12일 별세했다. 항년 84세.

보니(왼쪽)와 존 레인스 부부. 절도 감행 전 아이들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던 자신에게 용기와 확신을 심어준 것은 '공범'이기도 했던 아내 보니였다고, 존은 말했다. AP 자료사진

FBI 사무실을 털자는 말을 처음 꺼낸 건 해버퍼드(Haverford)대 물리학과 교수 윌리엄 데이비든(William Davidon, 1927~2013)이었다. 헌신적인 반전 평화운동가로 청년들의 신임을 얻고 있던 그는 집회와 시위만으로는 베트남전을 종식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60년대 말 베리건(Berrigan) 형제 신부의 반전보습운동과 일련의 징병사무소 습격에 착안한 그는 평화를 위협하는 배후인 FBI를 겨냥했다. 진영 내 FBI프락치들로 인해 조직이 와해되거나 시위가 무산되는 일도 잦았다. 겁 없고 진중한 동지들을 은밀히 규합했다. 그렇게 모인 게 20~40대 남자 5명과 여자 3명. 존-보니 레인스 부부와 파트타임 택시 기사 키스 포시스(Keith Forsyth), 사회복지사 밥 윌리엄슨(Bob Williamson) 등이었다.

그들은 경비가 상대적으로 허술한 미디어 지국을 타깃으로 정한 뒤, 근 석 달 간 현장을 조사하고 작전을 점검했다. 사무실 구조와 보안 실태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보니는 여성취업 실태를 조사하는 스와스모어대 학생으로 위장해 FBI 미디어 지국장을 인터뷰했고, 포시스는 통신강좌로 자물쇠 따는 법을 익혔다. 당일 권투시합이 풀라운드 접전이었던 것도 그들에게는 행운이었다. 첩보 스릴러를 방불케 하는 대담한 작전은 45분 만에 완벽하게 성공했다. 그들은 인근 퀘이커교도의 빈 농장에 모여 트렁크 4개에 옮겨 담아온 방대한 문건을 검토 분류한 뒤 복사본을 만들어 두 정치인(민주당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 하원의원 패런 미첼)과 세 언론사(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LA타임스) 워싱턴 지국에 보냈다. 그 날 이후 그들은 단 한 번도 함께 모이거나 연락한 적이 없었다.

FBI와 법무부는 ‘국익’과 안보, 요원ㆍ정보원의 목숨을 앞세워 협박에 가까운 설득으로 보도를 통제했고, 워싱턴포스트를 제외한 모두가 해당 문건을 FBI에 반환했다. 끝내 버틴 당시 포스트의 발행인과 편집국장이 워터게이트 때의 그들, 캐서린 그레이엄과 밴 브레들리였다.

기사로 폭로된 문건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반전 활동가와 시민권ㆍ흑인 인권운동가, 학생들을 도청ㆍ미행한 일지. 그들의 우편물을 뜯어 보되 은밀히 하지 말고 “그들 뒤에 언제나 FBI 요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라”는 지침과 함께 “24시간 감시되고 있다는 만성적인 편집증(망상 장애)을 유도하라”는 지시. 대학가 요원은 최소 6명의 정보원을 고용하되 우체부와 전화교환원 등을 적극 활용하라는 내용…. FBI 고위 인사가 64년 마틴 루터 킹에게 쓴 익명의 협박 편지도 폭로됐다. 노벨 평화상 시상식(64년 10월 13일) 한달 여 전에 발송한 그 편지에서 그들은 킹 목사의 혼외정사 증거 등을 언급하며 “국민 앞에 추악하고 부도덕하고 위선적인 모습으로 발가벗겨지기까지 딱 34일이 남았다. (…)그 사이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뿐이며, 그건 아마 당신도 잘 알 것”이라고 썼다. 편지가 암시한 선택이란 자살이었다.(NYT, 2014. 11.11)

68년 내부문건에 딱 한 번 언급된 ‘코인텔프로 Cointelpro’라는 정체 모를 단어가 ‘역정보 프로그램(Counter Intelligence Program)’의 약자이며, 후버의 지시로 56년부터 시작된 FBI 공작의 통칭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건, 73년 NBC뉴스 기자 칼 스턴(Carl Stern)의 집요한 취재 덕이었다. 민주당 상원의원 프랭크 처치(Frank Church)를 의장으로 75년 ‘미 정부 정보활동 조사특별위원회’(75년)가 꾸려졌고, “과도한 정부요원들이 과도한 시민들을 과도하게 감시했고 과도한 정보를 수집했다”는 뭉툭한 요지의 ‘처치보고서’(76)가 나왔다. 미국 정부는 국가 정보기관의 도ㆍ감청 영장 의무화 등 정보활동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물론 후버의 사후였고 대통령이 물러날 만큼 큰 스캔들이 터진 덕이 컸지만, 시동을 건 것은 그들 미디어 절도단이었다.

사건 당시 존-보니 부부에게는 8살 7살 2살의 세 아이가 있었다. 그들은 오래 망설였고, 특히 존은 여러 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아내의 열정과 확신 덕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WP, 2017.11.15)

존 커티스 레인스는 1933년 10월 27일 미네소타 주 미니에폴리스의 대형 연합감리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화장실만 7개였다는 대저택에서 성장해, 노스필드의 칼턴(Carleton) 칼리지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뉴욕 연합신학대에에서 기독교 사회윤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년 남짓 목회자(1959~61)로 일하다 시민권운동에 가담, 61년 ‘프리덤 라이더스(Freedom Rieders)’의 일원으로 미주리, 아칸소, 루이지애나 등 남부 분리ㆍ차별 주들을 돌았다. 그는 태어나 처음 맞아보고 감옥을 구경한 게 그 때였다. 2015년 인터뷰에서 그는 “권력이 어떻게 작동되고 남용되는지 그 때 비로소 알게 됐다”고 말했고, 2011년 인터뷰에서는 “처음으로 권력의 바깥으로 밀려나 권력에 의해 적으로 규정된 나를 발견했다”고도 했다. 그 무렵, 한 식당에서 미시건대를 중퇴하고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운동권’ 여성 보니를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66년 템플대 교수가 된 존과 주간탁아소에서 일하던 보니는 잇달아 태어난 아이들을 안고 업고 시위 현장을 누볐다.

절도 가담 전, 부부는 존의 형 부부에게 자신들이 만일 잘못될 경우 아이들을 맡아 잘 키워달라는 유언 같은 부탁을 남겼다. 존은 상충되는 책임에 대해 말했다. “아내와 나는 부모로서 아이들을 잘 양육해야 하는 책임과 그 아이들이 살아가고 또 자신들의 아이를 낳아 키워갈 이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책임에 대해 대화하곤 했다. 우리는 우리가 하지 못하면 누구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NYT, 2017.11.17)

사건의 반향을 지켜보며 그들은 흡족하기도 했겠지만, 언제 요원들이 들이닥칠지 몰라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제록스 사가 복사기 소재 확인에 협조하겠다고 밝혔을 때는 끝장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학교 복사기로 문건들을 복사한 게 레인스와 데이비든이었다. “당시 존은 늘씬한 몸으로 당당하게 법정에 서기 위해 과일과 치즈 다이어트를 하며 몸매를 가꾸고 멋진 다크블루 정장을 사두기도 했다”고, 메즈거는 위건트와의 인터뷰에서 전했다.

부부는 옛 젊은 동지들이 징병사무소를 털다가 체포돼 재판을 받고 무죄로 풀려나는 일 등을 뉴스를 통해 지켜보면서도, 이후로는 몸을 사리며 위험한 활동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존은 명망 있는 교수이자 성실한 아버지로 여생을 보냈다.

교수ㆍ학자들에 대한 에세이를 모은 학교 웹사이트 이-페스치리프트(e-festschrift)에는 제자와 동료들이 존에 대해 쓴 20편 가량의 추모 글이 올라와 있다. 중국 베이징 칭화대 교수라는 한 제자(Kiyul Chung)는 “존은 내가 여러 면에서 큰 빚을 진 고마운 은사”라며 “특히 그의 도저한 겸손(humble spirit)에 큰 깨우침을 받았다”고 썼다. 그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1971’로 제작한 방송PD 요한나 해밀턴(Johanna Hamilton)은 “존은 자신이 영웅처럼 그려지는 걸 원치 않는다고, 조국에 빚을 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아이들에게 더 나은 나라를 물려줄 책임을 다하고자 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philly.com) 존 레인스는 2011년 교직에서 은퇴했다.

책 출간 이후 그들은 큰 주목과 찬사를 누렸다. FBI 대변인은 “미디어 절도를 비롯한 그 시기 여러 사건들은 FBI가 국내 안보와 치안을 위한 활동 방식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그 덕에 FBI 개혁 및 법무부의 정보활동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공식 논평했다.

하지만 모두가 박수를 친 건 아니었다. 당시 미디어지국에 근무했던 한 FBI 요원(Patrick Kelly)은 “그들을 칭송하는 것은 부당하다. 누가 그들에게 (그 문건들을) 세상에 공개할지 말지 판단할 권한을 부여했는가?”라고 따졌다. 사학자로 퓰리처상을 탄 뉴욕대 교수 데이비드 오신스키(David Oshinsky, 1944~)는 스노든과 달리 심증만 가지고 정부기관을 침입해 문건을 훔친 것은 중대한 범죄행위였다고, 만일 그 문건이 별 게 아니었으면 어쩔 뻔 했냐고 한 칼럼에 썼다. 메즈거를 비롯한 여럿이 오신스키의 글에 반박했고, 존 레인스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60년대의 우리는 거리에서, 법을 어기는 것(breaking a law)과 범죄를 저지르는 것(committing a crime)은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흑백 분리를 보장하는 법이 헌법의 권리를 침해할 때, 그 법을 어기는 것이 범죄를 막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썼다.(NYT, 2014.2.13)

그들은 여러 매체 인터뷰에 성실히 임했다. 우쭐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60~70년대 FBI의 조국과 9ㆍ11 이후 애국법과 NSA의 조국을 대비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감당했던 상충되는 의무와 가치들을 2010년대의 시민들에게 함께 고민해보자고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존은 ‘한 내부고발자가 다른 내부고발자에게’라는 글과 서명을 적은 메즈거의 책을 러시아의 스노든에게 변호사를 통해 전했다. 그는 스노든의 사면을 강력히 촉구하며 이렇게 말했다.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일들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만일 당신이 정치인이라면 당신 역시 NSA에 강하게 맞서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형편없는 정부(poorly governed)의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최윤필 기자

“우리가 선출한 사람들이 헌법이 보장한 권리인 시민의 자유를 외면할 때,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누가 우리의 자유를 지켜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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