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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석의 성경 ‘속’ 이야기] ‘나사렛’ 예수와 ‘세리’ 마태의 만남

입력
2017.12.16 04:4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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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 테르부르그헨의 1621년작 '성 마태의 부름'. 하나님께 지목 받은 세리 마태가 자신인지를 되묻고 있다.
헨드릭 테르부르그헨의 1621년작 '성 마태의 부름'. 하나님께 지목 받은 세리 마태가 자신인지를 되묻고 있다.

영국서 살 때 그곳 친구들이 가끔 내 이름의 성(姓)이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 물어 볼 때가 있었다. 내 성씨가 ‘기이할 기(奇)’를 쓰기에 그 의미가 ‘extraordinary’ 즉, 보기 드물게 기이하다는 뜻이라며 나는 심상치 않은 집안에서 왔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물론 우리 가문의 시조께서는 진심으로 그런 비범한 집안을 꿈꾸셨을 것이다. 그곳에서 만난 여러 나라 친구들도 자기네 이름에도 성이 있으며, 그 성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알려주기도 했다. 요새 성이 없는 이름은 반려동물에게서 말고 사람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평소 성경을 읽으시는 분들은 문득 이런 의문이 들지는 않으셨는지.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수, 요한 등등 성경에는 많은 인물들의 이름이 남겨져 있는데, 여기에 성이 보이질 않는다. 그들 이름에는 성이 없었을까?

대부분 성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가문의 배경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네의 경우, 성만 가지고 그 가문의 배경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한국의 성씨는 표의문자인 한자를 빌어 사용하기 때문에 특정한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가문의 배경이 드러나 있지는 않다. 대신 어른 분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종종 ‘자네는 본관(本貫)이 어디인가’ 하며 물으시는 경우가 있다. ‘전주 이씨’ 혹은 ‘행주 기씨’ 등과 같은 성씨 본관은 그 조상이 과거에 주로 살았을 지역을 지정하여 가리키고 있다. 그 집안의 지역적 배경뿐만 아니라 신분적 배경도 어느 정도 드러내는 것이 본관이다. 그래서 우리네는 성 말고 본관으로도 서로를 소개하여 왔다.

외국인 이름의 성도 마찬가지로 그 가문의 배경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스콧(Scot)은 스코틀랜드를, 프란시스(Francis)는 프랑스를 가리키며, 일본 사람들의 성인 ‘야마다(山田)’, ‘다나카(田中)’, ‘모리(森)’ 등도 지역과 관계가 있다. 재미있게도 저명한 음악가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그의 성 바흐(Bach)가 ‘시내, 개천’을 뜻한다. 음악가 집안다운 서정성이 느껴진다고 하면 내가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우즈(Woods)는 ‘나무’나 ‘숲’이란 뜻이며, 이라크 전쟁을 발발시킨 전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의 부시(Bush)는 ‘덤불’을 의미한다. 물론 골프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우드’의 복수형인 우즈가 우연은 아닐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성에는 시조 집안의 가업이 드러나기도 한다. 스미스(Smith)는 대장장이를, 카펜터스(Carpenters)는 목수를, 베이커(Baker)는 제빵사를 의미한다. 코헨(Cohen)이란 이름의 조상은 유대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 뜻이 히브리어로 제사장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은 그 가문의 가업이나 출신 지역을 암시하는 기능을 하였다. 지역마다 다르긴 하지만 이름에 성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한다. 중국은 5세기부터이지만 대개 200년 안팎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성경 인물들은 이름이 짧아 보인다. 그래서 성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공식적인(?) 성은 아니어도 성의 기능을 하던 것은 분명히 있었다. 성경에서 인물들을 소개할 때 잘 보시기 바란다. 거의 대부분 누구누구의 아들 누구라고 소개한다. 예를 들어 유명한 선지자 이사야는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라고 소개된다. 이사야의 집안이 소개된 셈이다. 예언자 호세아도 마찬가지로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라고 소개되었다. 원래 유목민 기원을 가진 사람들은 지역보다는 가문을 중요하게 여긴다. 어느 지역의 누구보다는 어느 집안의 누구인가가 더 알리고 싶고 알고 싶어 하던 것이었다.

19세기 말 러시아에서 제작된 이사야 그림.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이니까 이사야 벤 아모스라고도 할 수 있다.
19세기 말 러시아에서 제작된 이사야 그림.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이니까 이사야 벤 아모스라고도 할 수 있다.

본래 히브리어로 적힌 이 예언자들의 이름을 음역하여 보면, 이사야의 경우 ‘이사야 벤 아모스’이며 호세아는 ‘호세아 벤 브에리’이다. 여기서 히브리어 ‘벤’(Ben)이 바로 ‘아들’ 혹은 ‘자손’이란 뜻이다. 그래서 현대 이스라엘 이름의 성에 ‘벤’이 자주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벤구리온’이나 ‘벤자민’이란 성을 들어보셨을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 이사야의 성씨는 ‘벤 아모스’라고도 할 수 있다. 영어 등으로 번역된 일부 유대교 성경은 ‘벤’을 ‘아들(son)’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그냥 ‘벤’으로 음역하기도 한다. ‘이사야 벤 아모스’를 이사야의 풀 네임(full-name)으로 적고 소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주변 아랍어권 나라에도 사람 이름의 성에 ‘이븐’(Ibn) 이나 ‘빈’(Bin)이 종종 나오는데 그 뜻도 역시 ‘아들’이다. 악명 높은 이름 오사마 빈 라덴이 그 한 예다.

성경의 이름들이 항상 그 조상을 지목하여 밝히지는 않는다. ‘레위 사람 아론’이라고 소개된 사람이 있는데, 레위는 집안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성직자라는 직분도 가리킨다.(출애굽기 4:14) 레위지파 사람들은 대대로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로 구별되어 왔기 때문이다. ‘무두장이 시몬’이라는 사람이 성경에 소개되는데, 무두장이는 짐승의 가죽을 다루는 사람을 의미한다.(사도행전 10:6)

성경의 인물이 이렇게 한번 풀 네임으로 소개되고 나면, 그래서 다른 사람과 굳이 구분하거나 출신 배경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경우는 그냥 이름만 쓴다. 마치 셰익스피어나 히틀러가 이름의 성이지만 아주 유명해져서 그 성만으로도 누군지 잘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유명한 성서 인물들은 성을 생략한 채 모세, 아브라함, 요셉 등으로 이름만 언급된다.

예수님은 살아계시는 동안 자주 ‘나사렛 예수’라고 불렸다. 예수는 나사렛이란 지역 출신이란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옥천 댁’이니 ‘안양 양반’이니 하며 출신지나 거주지를 들어 사람을 부르기도 했다. 좋게는 지역적 정감이, 나쁘게는 지역적 편견이 함께 전달되었을 것이다. 나사렛 출신의 예수를 소개하자 이런 반응이 있었다고 성경은 보고한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 올 수 있겠소?”(요한복음 1:46) 예수를 나사렛 예수라 부른 것은 그의 출신을 다소 비하하는 뜻이 담긴 것이다. 물론 그들의 전통답게 ‘요셉의 아들’이라 불리기도 했었다.

성경이 이름의 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보다시피 매우 유동적이었는데, 워낙 고대사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때로는 별명을 드러내어 그 이름을 가진 자의 특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독특하게도 예수님의 제자 마태는 자기가 기록한 복음서에서 자신을 ‘세리(稅吏) 마태’라고 불렀다.(마태복음 10:3) 세리는 당시에 매국노처럼 취급 받던 직종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종주국이었던 로마정부를 위해 동족의 혈세를 걷어가던 일을 했었기 때문이다. 세리 마태는 천하의 죄인이었던 자기를 겸허하게 그대로 드러내면서,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에게 벌어진 변화를 강조하여 밝히는 것이다.

타임지 표지에 등장한 이스라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 구리온 집안의 아들 다비드란 의미다. 구리온은 히브리어로 사자새끼다.
타임지 표지에 등장한 이스라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 구리온 집안의 아들 다비드란 의미다. 구리온은 히브리어로 사자새끼다.

사실 생각해보면 사람은 진짜 이름보다 별명이 더 의미심장하게 남겨질 수 있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 백남준, ‘현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처럼 말이다. 독자 분들도 자신의 별명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흥미롭게도 누군가의 이름은 다른 사람에게 붙여지는 별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슈바이처’를 들 수 있다. ‘외국인 노동자의 슈바이처 ㅇㅇㅇ’, ‘가난한 달동네의 슈바이처 ㅇㅇㅇ’에서처럼 이 이름은 명예롭게 오래도록 불려질 별명이 된 것이다.

예수께서도 생전에는 나사렛 예수였지만, 십자가 처형으로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별칭으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 헬라어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도자로 임명된 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메시아’를 번역한 것이며, 이스라엘을 구해내실 ‘구원자’란 의미로 쓰였다. 구원(救援ㆍsalvation)은 위험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어 살린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은 건져 내어져 살게 되는 것이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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