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자기 반 조손 가정 학생을 잊지 않고 배려한다. 어린이가 교실에서 혹시 소외를 느끼고 상처받을까 봐 말 한 마디 조심한다. 선생님 마음에는 우리 반 학생들 ‘그리고’ 이 어린이가 자리한다. 부모님 ‘그리고’ 할머니라는 말을 매번 빼놓지 않고 보태는 걸 보면 안다.

좋은 선생님 아닌가. 이런 역할은 학교 현장에서 교사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 이상일지 모른다. 선생님은 직업을 넘어 소명으로 일하는 교사로 보인다. 어린이는 자신에게 무관심하거나 행여 자신을 차별하는 담임을 만나지 않은 걸 행운으로 여겨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오히려 “쌤이 참 싫다”는 속내를 터뜨리고 있지 않나.

감사하는 마음이 없겠냐마는 싫을 법도 하다. 당연히 싫다. 선생님의 배려가 친구 사이에서 잠자코 있는 자신을 도드라지고 유별나게 만드니까. 할머니와 둘이 사는 제 형편을 계속 상기시키는 선생님이 왠지 원망스럽게 느껴지겠다. 자신을 그냥 좀 모른 척 내버려두라고 소리치고 싶지 않을까.

타인을 향한 배려가 때로 타인에게는 폭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선한 의지가 모든 행위의 정당성을 변호해준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자기중심적이다. 타인을 정말 아끼는 마음은 끊임없이 세심한 눈으로 바라보게 하고 조심한 걸음으로 다가가게 한다. 타인은 나와 다른 존재이기에 그 마음이 끝내 이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가운데 아주 잠시, 조금이라도 타인에게 닿을 틈이 펼쳐진다고 믿는다.

선생님이 어린이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듯 어른과 어린이의 관계는 특히 일방적이기 쉽다. 어린이는 약자고, 약자에게는 배려란 이름의 폭력이 일상적이다. 다른 친구들 ‘그리고’ 자신을 구별하는 선생님의 섣부른 시선에서 어린이가 오히려 소외를 느낀 것처럼. ‘그리고’라는 괄호로 어린이를 묶어두지 않으면서 어린이와 함께 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시인의 답은 다음 시에 있는 듯하다.

‘아버지 일 나가고/혼자 잠 더 자는데/선생님한테 전화가 왔다.//“아직 자고 있나?/같이 밥 먹자./빨리 온나.”//공부하러 오라는 말보다/훨씬 무서워/얼른 가방을 챙긴다.’(‘밥 먹으러 온나’ 전문)

아마도 학생 사정을 대략 알고 있을 선생님은 결석한 이유를 묻거나 야단치지 않는다. 최근 많은 이들에게 ‘저런 교사, 어른이 되고 싶다’는 감동적인 다짐을 불러일으킨 영화 <땐뽀걸스>의 선생님이 떠오른다. 학생들이 반말로 대화하고, 놀리고, 툭툭 치며 어울리던 댄스 동아리반 선생님.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로 학생들 옆에 있던 모습이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는 선생님 목소리와 겹친다.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면? 어린이 ‘눈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김유진 어린이문학평론가ㆍ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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