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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히든히어로] 말로 하는 농구 기록원 ‘스포터’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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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히든히어로] 말로 하는 농구 기록원 ‘스포터’를 아시나요

입력
2017.12.08 04:4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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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차 기록판정원 최양임 스포터

경기 내용 말하면 기록원이 적어

대기록 앞둔 선수엔 미리 알려주고

선수들 기록 욕심에 항의 받기도

5명만 선택 받은 농구 전문 직업

프로농구 스포터 최양임씨가 지난 3일 안양실내체육관에서 경기 전 기록 판정 모습을 시연하고 있다. 안양=홍인기기자
프로농구 스포터 최양임씨가 지난 3일 안양실내체육관에서 경기 전 기록 판정 모습을 시연하고 있다. 안양=홍인기기자

지난 3일 안양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안양 KGC인삼공사와 울산 현대모비스의 2017~18 정관장 프로농구 경기. 최양임(57)씨의 눈이 쉴새 없이 움직이며 입으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다. “41번 2점 미스(실패)에 9번 OR(공격 리바운드).”

최씨의 직업은 농구 종목에만 있는 스포터(spotter), 이른바 기록판정원이다. 모든 스포츠는 데이터를 남기고, 이는 역사가 된다. 그 중에서 방대한 룰과 변수가 많은 프로야구는 경기 중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꼼꼼하게 체크해 기록지에 작성한다. 프로농구는 그에 비하면 비교적 단순하다. 하지만 시간과의 싸움을 즐겨야 한다. 때문에 프로야구에는 2명의 기록원으로 충분한 반면 농구엔 기록 통계원, 8초 계시원, 24초 계시원 등 관련 업무에 투입되는 인력만 8명이다. 정적인 야구는 이닝 볼 데드(심판원의 타임이나 정해진 규칙에 의해 경기가 일시 중지된 상태) 상황이 종종 나와 기록원도 숨을 고를 시간이 있지만 농구는 일단 휘슬이 울리면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어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된다. 야구처럼 기록원 한 명이 경기도 보고, 기록지도 작성할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프로농구 출범 이듬해인 1997년 탄생한 직업이 스포터다. 이들이 경기 내용을 쉴새 없이 말하면 옆에 앉아 있는 기록원이 받아 적는다. 방송 중계 캐스터처럼 자세하게 설명할 시간도 없어 선수 이름 대신 등번호로 말하고 어시스트는 A, 리바운드는 R 등 최대한 간단한 용어로 압축해 표현한다. 최씨는 “말 그대로 선수들의 기록을 판정하는 역할이다. 크게 득점과 어시스트, 리바운드 등 기록지에 나오는 모든 기록을 관리하는 일”이라고 했다.

오세근의 트리플더블이 탄생하기까지

KGC인삼공사의 오세근은 지난달 2일 부산 KT와 홈 경기에서 3쿼터까지 트리플더블에 어시스트 1개만 남겨 놓았다. 당시 스포터를 맡았던 최씨는 “선수 대기록이 눈앞에 왔을 땐 경기 내내 기록을 체크하고 있던 우리가 구단에 얘기를 해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굳이 얘기를 안 해도 1개 남은 어시스트를 추가할 확률은 높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어시스트가 전문이 아닌 ‘빅맨’ 오세근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더라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씨는 “기록이라는 건 역사에 남는 건데 내가 ‘말한’ 기록을 가지고 선수가 대기록을 달성했다면 나 역시도 뿌듯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농구는 다른 종목과 달리 스피드가 엄청나게 빨라 스포터도 순발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순간적으로 판정에 실수를 했다고 거기에 얽매여 있을 시간이 없다. 그는 “가령 패스미스를 했는데 받는 사람이 실수하는 경우도 있고, 블록을 하기 위해 두 선수의 손이 동시에 닿았을 때 판정이 곤란하다”면서 “특히 최근엔 기량이 뛰어난 용병들이 많이 영입되면서 종종 나온다. 그럴 때는 경기 후에 다시 검토를 해서 공헌도가 높은 선수에게 기록을 준다든지, 최대한 정확한 판정에 만전을 기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기록에 욕심이 있는 선수들이 구단을 통해 항의할 때도 있다. 최씨는 “몇 분 몇 초에 이 선수 리바운드인데 다른 선수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식이다. 명백하다면 정정을 하는 게 맞지만 사실 자기 구단 선수이다 보니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러 있다. 우리 매뉴얼 기준을 설명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씨는 “하지만 기록 하나에 연봉이 왔다 갔다 하는 선수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또 선수라면 그런 태도도 필요하다. 서장훈 선수가 현역 시절 자기 기록을 엄청 챙겼다. 그랬기 때문에 그런 대기록을 세운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5명의 여성 ‘장인’들

스포터는 KBL리그 10개 구단 감독 수의 절반인 5명만 선택 받은 직업이다. 스포터가 도입된 건 프로농구 출범 다음 시즌인 1997~98시즌부터다. 1997년 10월 모집한 1기 스포터에 지원해 뽑힌 후 올해로 21년차가 된 최고참이다. 최씨 외에 오미경(51), 이강희(48), 손지선(45), 이선형(40)씨까지 5명 모두 여성이며 경기인 출신에 베테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에 대해 최씨는 “경험을 토대로 순간 순간 판단해야 하는 일이라 비선수 출신에겐 솔직히 한계가 있다. 또 아무래도 섬세하고 꼼꼼한 일이다 보니 여성들에게 유리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이들 외에 3명의 인턴 스포터가 D리그에서 선배들로부터 교육을 받고 있지만 단기간에 습득하기 어려운 고난도 ‘기술’이다. 최씨는 “특히 여자농구연맹(WKBL)에 비해 KBL의 농구 스피드는 엄청나게 빠르며 그 중에서도 빠른 농구를 하는 팀은 정말 눈을 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최근엔 포털 사이트의 문자 중계가 활성화되면서 취재진을 비롯한 농구 관계자들이 기록지에 대한 소중함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은 아쉬움도 있다고 했다. 최씨는 “후배의 권유로 스포터에 입문한지 21년이 흘렀는데 농구인이라 그런지 농구장에 오면 직업을 떠나 스트레스가 풀린다”면서 “근래에 농구 열기가 많이 식었는데 예전의 붐이 다시 일어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안양=성환희기자 hhs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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