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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죽음이라는 유산

입력
2017.12.07 11:0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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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다큐 한 편을 봤다. 갠지스 강이 벵골만으로 흘러드는 삼각주 지대 순다르반스. 세계 최대의 맹그로브 숲이 있는 곳. 가난한 주민들에게는 숲의 벌꿀이 중요한 수입원이지만 벵골 호랑이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한 해 150명가량이 목숨을 잃는다. 벌꿀 채취 기간이 2주로 제한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 어린 딸과 아내를 건사해야 하는 한 젊은이는 아버지를 따라 숲으로 들어간다. 숲속에서는 고함을 질러 호랑이의 접근을 막는다. 다행히 벌꿀 채취에 성공한다. 꿀을 자르는 일은 초행의 아들 몫이다. 대견해하는 아버지 곁에서 아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한다. 꿀을 팔면 60불, 가족의 1년 생활비다. 동남아 어딘가의 거대한 해안 동굴 이야기도 있다. 아버지와 젊은 아들이 동굴로 들어간다. 거기 금사연(金絲燕)이 해조류에 침을 섞어 지어 놓은 제비집이 있다. 밧줄 사다리가 설치된 곳은 하늘이 뚫려 있는 까마득한 절벽이다. 아버지가 아래에서 사다리를 잡고, 아들이 오른다. 94m 높이에서 대나무 다리를 통해 절벽으로 접근한다. 아들은 말한다. 이렇게 번 돈으로 자신의 아이를 교육시키고 싶다고. 아이에게는 절대 이 일을 시키고 싶지 않다고.

필립 로스의 ‘아버지의 유산’(정영목 옮김, 문학동네)은 86세의 아버지에게서 뇌종양이 발견되고 2년 뒤 세상을 뜨기까지의 시간을 기록한 글이다. “죽는 것은 일이었고 아버지는 일꾼이었다. 죽는 것은 무시무시했고 아버지는 죽고 있었다.” 아버지가 행하고 아들이 기록한 죽음의 노동일지인 셈이다.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작가의 아버지는 8학년이 최종 학력이지만 굴하지 않는 투지로 하루하루 차별과 모욕의 전쟁터를 헤쳐 나왔고 보험회사 관리직으로 정년 퇴직했다.

그 생존의 투쟁일지이기도 한 이 책은 필립 로스 소설의 단호한 현실주의가 뿌리내리고 있는 강고한 유산을 곳곳에서 증명한다. “나는 아버지에게 일상어를 배웠다. 아버지 자신이 바로 일상어, 시적이지 않고 표현이 풍부하고 바로 과녁을 노리는 일상어, 그 모든 뻔한 한계와 더불어 그 모든 끈덕진 힘을 지닌 일상어였다.” 유언장에서 자신의 몫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한 뒤(이것은 작가 자신의 뜻이었다), 작가가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듯한 당혹스러운 느낌에 빠지는 장면이 있다. 그 돈은, “힘들게 일한 아버지의 가죽, 진짜 가죽은 아닐지라도, 아버지가 극복한 또는 견디고 살아남은 것의 구현물”이었던 것이다.

유산의 물질성에 포함된 가장 강력하고 끈질긴 끈이 여기 있었다. 어린 시절의 작가를 그토록 좌절시킨 아버지. 대학 강의실에 들어가며 작가는 아버지의 분신으로 거기 존재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왜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아버지와 연결된 방식이 더 비비 꼬이고, 더 깊어질 수 있는 것이었음을 작가는 몰랐다. 이 책은 그 각성의 일지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이해 못하겠어.” 아버지의 똥이 유산이었다. “그것을 치우는 것이 다른 뭔가를 상징해서가 아니라 상징하지 않았기 때문, 살아낸 현실 그 자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뉴어크 구석구석의 역사를 다 알고 있는 아버지에게 삶은 ‘기억’하는 일이었다. “어떤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아버지의 문장(紋章)은 작가 자신의 다짐으로 재차 등장한 뒤, 책의 마지막에 다시 돌아온다. 아버지와 아들의 최종적인 연결 지점일 테다. 그런데 이상하다. 로스 집안의 이야기를 넘어 죽음에 맞서 온 인간 종의 끈덕진 저항을 담고 있는 이 말이 내게 지나간 세계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은. 이즈음 ‘아버지의 유산’은 그 어느 쪽이든 낯선 언어가 되고 있다. 죽음이 그저 그런 것일 때, 인간의 자리는 얇아진다. 필립 로스의 책은 말해 준다. 죽음이 인간의 진정한 유산이라는 것을.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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