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법관 후보자로 여성인 민유숙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임명 제청됐습니다. 내년 1월 물러나는 박보영 대법관 후임자로 발탁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대법원을 구성하는 14명(대법원장 포함) 중 여성 대법관이 3명뿐이라는 현실을 감안하면 ‘여성 몫을 잃지 않아 다행’이라고 받아들이기엔 아쉬운 감이 있습니다.

대법원은 지난달 28일 새 대법관 후보자 2명을 공개하며 그 동안 대법관의 공식처럼 여겨지던 ‘서울대, 50대, 남성’(일명 ‘서오남’)을 탈피해 ‘비(非)서울대’ ‘여성’ 후보자를 중용한 점을 강조했습니다.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기대를 각별히 염두에 뒀다”는 설명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대한민국 대법원에선 그 동안 ‘여성’ 대법관이 매우 희귀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김영란법’ 토대 김영란 판사
2004년 ‘1호 여성 대법관’

대법관과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사법부 최고위직으로 분류됩니다. 이 자리에 여성이 진출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남성과 여성 법조인이 매년 비슷하게 배출되고 있지만, 여성이 대법관에 오른 것은 불과 최근 10여년 전입니다. 그 전에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제1호 여성대법관’은 바로 ‘김영란법(부정청탁금지법)’을 탄생시킨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입니다. 김 전 대법관은 2004년 8월 대법관에 임명됐습니다. 1949년 9월 26일 대한민국 정부가 법원조직법을 공표한 지 55년 만에 처음 배출한 여성 대법관입니다.

김 전 대법관 이후 여성 대법관은 점차 늘어나 2년 뒤인 2006년 7월 전수안 전 대법관이 임명됐고 2012년 1월 박보영 대법관이 임명됐습니다. 올해 7월 사법 역사상 첫 여성 법원행정처장에 임명된 김소영 대법관도 같은 해 11월 대법관에 올랐습니다. 올해 7월 합류한 박정화 대법관은 다섯 번째 주인공입니다. 민유숙 후보자가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되면 여섯 번째 여성 대법관이 되는 것입니다.

헌재 1호 여성 재판관은 전효숙
헌재 소장 지명됐다 철회되기도

대법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고 사법기관 헌법재판소의 사정은 어떨까요. 첫 여성 헌법재판관인 전효숙 전 재판관은 김영란 전 대법관보다 1년 이른 2003년 8월 임명됐습니다. 이후 2006년 8월 헌법재판소장 후보로도 지명돼 사상 첫 여성 헌재소장이 탄생하는가 싶었지만, 헌법재판소장 임기 논란으로 지명이 철회되면서 그는 6년 임기를 모두 채우지 못한 채 3년 만에 헌재를 떠났습니다. 헌재는 그로부터 5년 동안은 여성 재판관 없이 9명의 남성 재판관들로만 헌법소원과 위헌법률심판 등 사건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두 번째 여성 헌법재판관은 탄핵심판 당일 ‘헤어롤’로 각인된 이정미 전 헌재소장 권한대행입니다. 올해 3월 13일 퇴임한 이 전 재판관은 2011년 3월 만 49세라는 역대 최연소 재판관으로 헌재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2015년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폐지된 간통죄에 대해 “간통은 가족공동체 보호에 파괴적 영향을 미친다”며 합헌 소수의견을 내는가 하면, 독신자가 양자를 입양할 수 없도록 한 옛 민법 조항에 대해 “편부모 가정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타파돼야 하고 독신자 입양을 봉쇄하는 것은 오히려 사회적 편견을 강화시킨다”며 반대 의견을 내는 등 헌재 결정의 다양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올해 3월 취임한 이선애 재판관도 취임사에서 “여성 법조인으로 살아오면서 얻은 경험과 문제의식을 잊지 않고, 우리 사회가 여성재판관에게 기대하는 바를 고민하겠다”고 말했습니다. 1988년 설립 이후 30년간 불과 3명의 여성 재판관만이 헌재 결정에 참여한 현실과 이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짐하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성 법조인 적어 소수 불가피
여자 화장실 늘어난 것도 최근

이처럼 최고법원 고위직에 여성법관이 적은 이유는 여성 법관 자체가 적었던 이유도 있습니다. 여성이 법조계에 진출한 시점이 비교적 늦기 때문입니다. 김소영 대법관은 2014년 한 행사에서 “제가 판사로 임관한 1990년에는 여성 판사가 불과 20명 남짓이었고 법원에 여자화장실이 2개밖에 없었습니다. 여성 판사가 많이 들어오니 비로소 층마다 여자화장실이 생겼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여성 판사들이 최고위직에 진출할 정도의 충분한 경력을 갖추기엔 그만한 절대적 시간이 필요했다는 뜻입니다.

김 대법관은 “여성이 조직에서 주요한 위치에 있어야 실질적 변화가 일어난다”고 강조했는데, 해외 사법기관 고위직의 여성 진출은 어떨까요. 지난해 미국 연방대법관 8명 중 여성은 3명,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16명의 재판관 중 여성은 5명입니다. 프랑스 헌법재판소는 9명의 재판관 중 4명이 여성입니다. 모두 우리나라보다는 여성 비율이 높은 편이죠.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다양한 시각과 가치관을 반영하기 위해 성비뿐 아니라 인종과 정치적 성향 등을 두루 고려해 최고법원을 구성한 결과입니다.

성비 균형이 헌법적 가치 구현
엘리트 여성만 발탁은 재고해야

여성 대법관 비율이 낮다는 문제의식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2012년 7월 퇴임한 전수안 전 대법관은 사법부를 떠나며 “전체 법관의 비율과 상관없이 성비 균형을 갖춰야 하는 이유는, 대법원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상징이자 심장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헌법기관은 그 구성만으로도 벌써 헌법적 가치와 원칙이 구현돼야 한다”는 말도 곁들였습니다.

법원이 내리는 판결은 소송 당사자들에게 ‘법적 구속력’을 가집니다. 특히 1,2심에서 내려지는 하급심 판결은 물론 대법원이 내리는 판결은 앞으로 나올 전국 각급 법원의 판결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매우 큽니다. 이런 판결 가운데에는 세상의 절반이나 되는 여성의 시각과 가치관이 반영돼야 하는 사안도 적지 않습니다.

여성 비율만 늘린다고 다양화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새겨볼 만합니다. 역대 여성 대법관과 헌법재판관들 면면을 보면 대부분 정통 법관의 길을 밟았거나 사법시험 수석합격 또는 한국여성변호사회장을 역임하는 등 여성 법조인 중에서도 ‘엘리트’로 손꼽히기 때문입니다. 대법원과 헌재 구성의 실질적 다양화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여성만 뽑는 게 능사가 아니며, 여성 법조인들의 배경 역시 다양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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