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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청년들] 5대 시중은행 고졸채용 2012년 502명ㆍ작년 188명 ‘씁쓸’

입력
2017.12.02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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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정부 고졸채용 추진했지만

은행, IT발달로 고졸인력 줄여

대기업 생산직도 대졸자들 진입

작년 공공기관 215곳 고졸선발 ‘0’

은행들의 고졸 채용이 정점에 달했던 2012년 특성화고 학생들이 서울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에서 열린 고졸 신입행원 채용을 위한 채용박람회에서 채용상담을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은행들의 고졸 채용이 정점에 달했던 2012년 특성화고 학생들이 서울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에서 열린 고졸 신입행원 채용을 위한 채용박람회에서 채용상담을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글로벌 금융위기가 강타한 2008년은 한국 사회가 ‘대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성찰에 강제적으로 착수한 해다. 끝날 줄 모르는 경제난의 암운을 미처 눈치채지도 못하고 있던 이 때,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고 이듬해 대학에 진학한 고교 졸업생은 인문계고와 전문계고를 합쳐 77.8%에 달했다. 전국 고교생 10명 중 8명이 대학에 진학한 것이다.

대학은 반드시 가야 한다는 한국 사회의 강고한 학력차별 문화는 직업계고 졸업생들도 그냥 놔두지 않았다. 2009년도 고교 직업교육 대상자(특성화고+마이스터고+일반고 직업반)의 무려 73.5%가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대신 취업을 위해 들어간 고교임에도 졸업 후 실제 취업한 학생은 16.7%뿐. 역대 최저치였다. 학력 인플레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고, 교육 과잉투자는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병폐로 지탄받았다. 연간 1,000만원에 육박하는 등록금만으로도 허리가 휠 지경인데, 생활비와 기타 교육비, 각종 기회비용까지 계산하면 대학은 더 이상 빚지고라도 반드시 가야 하는 곳이 될 수 없었다. 경제 취약층이 가장 먼저 대학 포기라는 비자발적 선택에 내몰렸다.

이명박 정부가 핵심 국정과제로 내세운 고졸 채용은 자연스럽게 시대적 화두가 됐다. 정부의 밀어붙이기 정책에 고졸 채용의 빛나는 상징이었던 금융권이 화답했다. 2011년 10월 이주호 당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과 국내 5개 금융업회장들이 모여 ‘고졸인력 채용 장려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 당초 목표보다 443명이 늘어난 2,978명 고졸 직원이 채용됐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며 채용 정책의 주요 타깃은 고졸에서 경력단절여성으로 옮겨갔다. 고졸에게는 다시 기회의 문이 좁아졌다. 2012년 502명으로 정점에 달했던 5대 시중은행 고졸 채용 인원은 이후 감소 추세로 들어서 지난해 188명, 올 11월 말 현재 125명에 그쳤다.<표 참조>

금융 인력 전체를 놓고 보면, 고졸 직원은 4명 중 1명 수준이다. 금융연구원의 ‘2016년 금융인력 현황조사 및 수급 전망’에 따르면 은행의 고졸자 비중은 23.2%로, 2년 전인 2014년 24.6%에 비해 1.4%포인트 줄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핀테크 기술 발달로 인한 점포 감소 등으로 은행들이 대면 채널을 줄이는 상황”이라며 “비대면 채널이 발달함에 따라 고졸 채용 수요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졸로도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아줄이었던 은행마저 IT 혁명이라는 산업 4.0의 기류 속에서 그 기회의 끈을 거둬들이고 있는 것이다.

올 6월 울산대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현대·기아자동차 협력사 채용박람회를 찾은 구직자들이 각 부스에서 상담을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올 6월 울산대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현대·기아자동차 협력사 채용박람회를 찾은 구직자들이 각 부스에서 상담을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상업계열 특성화고 졸업생들에게 은행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이라면, 공업계열 특성화고 학생들에겐 대기업 기술생산직이 그렇다. 직원 평균 연봉 9,600만원으로 채용 공고만 났다 하면 서버가 폭주하는 현대ㆍ기아차는 그러나 최근 몇 년 간 생산직 신입 공채를 하지 않았다. 사내하청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으로 신규채용 TO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고교 및 전문대 졸업자를 대상으로 채용 공고를 낸 2011년 이후로는 학력 구분 없이 채용절차를 진행하고 있어 기술생산직에 대졸 이상의 고학력 직원도 들어오고 있다. 현대ㆍ기아차 관계자는 “과거에는 고졸이 절대 다수였지만 학력 철폐로 인해 대졸 이상 직원도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라 고졸에게 기회가 줄어든 측면이 있다”면서도 “기술직을 오래 준비한 공고 기계과 졸업생이나 전문대 자동차 기계학과 졸업생들이 일반 대졸보다 업무성과가 뛰어나기 때문에 면접 과정에서 훨씬 유리하고 결과도 좋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역시 열린 채용 기조로 5급인 생산직에 따로 학력제한을 두지 않는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생산직에 지원할 수 있지만, 실제 채용에서는 고졸 우선으로 뽑고 있다”고 말했다. 대졸 직원이 생산직으로 입사하면 대졸 이상을 대상으로 채용하는 3급과 처우 차이가 나 직업만족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정부는 공공기관에 고졸 채용 20%까지 확대를 권고하고 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다. 지난해 전체 정규직 채용인원 2만1,016명 중 고졸 인력은 1,949명으로 9.3% 수준이다. 기획재정부는 2012년 ‘공공기관 고졸자 채용 가이드라인’을 처음 발표하면서 “공공기관은 고졸적합직무를 기준으로 고졸을 채용하되, 총무 행정 인사 기획지원 회계 홍보 전산 등 공통 고졸적합직무 외에도 기관 업무특성에 맞는 고졸적합직무를 적극 발굴”할 것을 권고했다. “필요 시 고졸 이하로 자격을 제한하는 제한경쟁 또는 할당경쟁을 통해 채용하고, 고졸적합직무에는 고졸자를 우선 채용할 수 있도록 제한기준을 설정”하는 매우 적극적인 고졸 채용 방안이었다. 하향지원자를 방지하기 위해 대졸자는 사후 발견 시 합격 취소 및 징계 해고함을 채용 공고에 기재토록 하기까지 했다. 20016년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고졸 신입은 대졸자 직무수행에 필요한 다양한 경로의 업무습득 경험을 축적한 후(통상 4년) 대졸자와 동일한 보직경로로 이동할 수 있으며, 급여도 대졸의 70% 이상에서 초임을 시작해 근속승진 최소기간 후 대졸초임과 동등한 수준의 보수를 제공받을 수 있다.

그러나 구속력 없는 매뉴얼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공공기관 경영평가에 반영하는 것 말고 고졸 채용할 강제할 방법도 없다. 그 결과, 중앙정부 각 부처 산하 공공기관(332곳)과 그 부설기관(23곳) 총 355곳 중 60.6%인 215곳에서 지난해 단 한 명도 고졸 인력을 신규 채용하지 않았다.

직업계고 졸업생의 취업률은 올해 50%를 넘기며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지만, ‘취업 성공’으로 명명하기엔 일자리의 질이 암울하다. 제주 한 음료공장에서 현장실습을 하다 홀로 적재기 프레스기에 눌려 사망한 이민호군의 애통한 죽음은 이제야 여론을 환기하고 있지만, 앞서 무수한 현장실습 중 사고가 있었다. 현장실습이 전공과 일자리의 맞춤연계가 아니라 기피되는 질 낮은 일자리에 학생들을 밀어 넣는 최하위 노동자로의 편입 경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교육부는 서둘러 현장실습을 폐지키로 하고, 지방교육청마다 특성화고 현장실습 실태조사와 개선대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고졸 취업의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는 없다.

특성화고 졸업 후 웹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선형진(가명ㆍ23)씨는 “정부에서 무조건 고졸 쿼터를 채우라고 밀어붙일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어떤 일에 적합한지, 할 수 있는 적합한 직무는 무엇인지 개발하고 발굴해 취업시켜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책 홍보용으로 고졸 많이 뽑으라고 강제하면 뭐 하나요. 기업과 고졸 취업자의 수요공급이 맞아야죠. 기업은 무조건 대졸 이상만 지원받고, 정부는 무턱대고 고졸을 더 뽑으라고 밀어붙이고.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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