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얕은 셈법으로 환란 부른 ‘4류 정치’
정략 논리로 경제정책 ‘칼질’ 여전
‘정치 과잉’이 경제 다시 망칠 수도

외환위기 20주년을 맞아 당시와 오늘을 돌아보는 뉴스가 많다. 특히 최근 그런 뉴스가 많아진 건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날이 11월21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부 젊은이들은 이 날을 외환위기 발발일로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11월21일은 우리 경제가 위기 끝에 마침내 파국을 맞은 날이고, 위기의 전개는 그보다 훨씬 전이라고 봐야 한다.

역사의 경과는 시각에 따라 달라진다. 외환위기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는 은행ㆍ종금사의 부실이, 다른 이는 한보와 기아차그룹 같은 기업 부실이 위기의 도화선이었다고 본다. 내 경우는 당시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 정책’을 추진할 때, 정치에 오염돼 빚어진 몇몇 정책 실패야말로, 기어이 위기를 부르고야 만 결정적 패착이라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내게 1997년 외환위기의 역사는 늘 1994년 11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김영삼 정부는 간판 산업정책인 ‘업종전문화정책’을 스스로 폐기했다. 원래 재벌기업이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지 말고 가장 자신 있는 사업에 집중해 우리 산업의 국제경쟁력을 극대화하자는 취지로 시행됐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경기가 좋았고, 거대시장인 중국까지 떠오르자 기업들은 너도나도 몸집을 키우고 신사업을 벌이려고 들썩였다.

업종전문화정책은 ‘관치’였으나 거품 예방과 경쟁력 강화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그걸 돌연 정부 스스로 뭉개버렸다. 부산 출신인 한이헌 당시 경제수석이 앞장섰다. 그는 “정부가 기업의 주력업종을 지정하면 기업의 유효경쟁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으니 업종전문화든 다각화든 기업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사실상 정책 폐기를 선언했다. 말이 좋아 자율화지, 당시 부산에 공장 짓겠다고 나선 삼성의 자동차사업을 허용하기 위한 ‘꼼수’였다.

그렇게 삼성자동차가 허용됐다. 얕은 정치 셈법에 따라 경제정책의 근간이 흔들린 것이다. 그 결과 국내 자동차업계의 과당경쟁이 촉발됐고, 기아차가 무리하게 추진한 시설확장과 특수강사업 진출로 거대한 부실을 쌓은 채 무너져 외환위기의 근인(近因)이 됐다. 업종전문화정책 폐기는 이어 철강, 유화, 조선 등 산업 전반에 걸쳐 국내 업체 간 중복적 투자경쟁을 촉발했고, 자본조달 과정에서 거대한 금융부실을 낳았다.

업종전문화정책뿐만이 아니다. 임기 내 ‘선진국 진입’의 치적을 쌓고자 했던 김 대통령의 집착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조기 가입을 위한 무리한 외환자유화 조치를 낳았다. 그게 나중에 종금사들이 막대한 외화를 빌려 파국을 부른 발단이 됐다. 은행을 오염시켜 한보의 부실을 부추긴 것도 결국 정치였고, 나라 경제의 존망을 가를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아차 정쟁에만 몰두한 것도 정치였다.

그 즈음 자동차사업을 추진하며 정권과 부대꼈던 이건희 당시 삼성 회장이 남긴 말이 인상적이다. 그는 95년 4월 중국을 방문해 “우리나라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는 말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그 ‘4류 정치’가 ‘원칙도 일관성도 없이 단순한 정치적 셈법으로 경제를 망가뜨리는 정치’라는 의미였다면 전적으로 옳다고 본다.

문제는 오늘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고 했다. 하지만 경제를 뒤죽박죽으로 헝클어버리는 ‘4류 정치’는 오늘도 여전하다. ‘공정경제’에 방점을 찍은 문재인 정부의 정치적 지향이 잘못됐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 지향을 낳은 정치의식 자체에 생각이 갇히거나, 선거밖에 생각 못하는 정권 내의 완강한 ‘정치 중심주의자’들이 경제 전반의 유기적 균형을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얘기다.

청와대는 최근에도 정부의 ‘규제프리존특별법’에 대해 “국정철학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틈만 나면 ‘균형 있는 경제정책’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여전히 ‘4류 정치’를 넘어서지 못한 정권 핵심부에 맞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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