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행사라며 선정적 춤 강요 대학병원
“딸 같아서” “아들 같아”와 다를 바 없어
사회에 만연한 ‘가족주의’ 병폐 고쳐 가야

어느 대학병원이 재단 행사 준비라며 간호사들을 상습적으로 혹사시키고 그들에게 노출이 심한 옷을 입혀 무대에 서게 한 사건이 화제가 되고 있다. 맨살이 드러난 사진이 불을 지펴 고구마 캐듯 줄줄이 터져 나오는 이 병원의 내부고발 내용이 자못 가관이다. 의사의 간호사 성희롱 주장이 있는가 하면 특정 정치인에 대한 후원금 강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런데 문제의 그 행사 사진에서 선정적 옷차림보다 더 눈길을 잡아 끈 장면이 있었다. 헐벗은 간호사들 뒤로 커다랗게 내걸린 ‘일송가족 장기자랑’이라는 플래카드다.

이 ‘가족’이라는 말, 왠지 낯설지 않다. 장군의 부인이 공관병을 하인처럼 부려 놓고 했던 “아들 같아서”, 골프장에서 캐디를 성희롱한 정치인이 말한 “딸 같아서”, 여학생들을 성추행한 목사의 “딸 같은 아이들”과 오버랩 된다. 분명히 ‘남’인데 스스럼 없이 딸 같고, 아들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은 그게 어느 정도 먹힐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직장 뒤에 가족 이름을 붙이는 것은 구성원의 가족까지 참여한다는 뜻도 있지만 직장 구성원이 가족 같다는 의미를 담는다. 같은 직장을 다니면 가족인가. “대한민국에서 아들 딸로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틀리지 않다.

이렇게 보면 누군가는 ‘행복의 원천’이라고 한 ‘가족’을 사회가 타락시키는 것만 같다. 하지만 가족을 훨씬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실은 가족 그 자체다. 술 먹고 아내와 자식 때리기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아버지, 어린 아이를 학대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부모. 주위에서 개입하려고 하면 꼭 “남의 가족 일에 웬 참견이냐”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런 폭력의 극한은 자신이 죽은 뒤 남을 가족을 걱정해 그들까지 다 같이 죽이는 경우다. 주로 가부장제의 몽매한 권위가 만들어 내는 이런 폭력은 가정을 지옥으로 만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서서히 해체의 길을 걷고 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전국의 가구 형태는 2년 뒤엔 1인 가구가 30% 가까이로 가장 많아진다. 2045년쯤 1인 가구는 전체의 36%를 넘어서고 전통적인 가족 형태인 부부ㆍ자녀 동거 가구는 그때쯤엔 1인 가구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물론 가구 형태가 바뀌었다고 가족이 사라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원룸을 빌려 나가 살아도 매일 부모에게 안부 전화를 해야 하고, 김장을 도우러 와야 하며, 불시 생활 점검을 감수해야 한다. 생활비 달라고 손 벌릴 수 있지만 부모 부양을 위해 애써 번 푼돈을 쪼개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구의 외형만이 아니라 배타적이고, 가족끼리 의무를 강조하는 한국 사회의 규율ㆍ관습이 조금씩 바뀌는 것도 사실이다. 아동 학대에 대한 공적 개입의 폭은 갈수록 커지고 있으며, 의무부양제가 폐지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가까스로 가족의 속박을 벗어난 사람을 바로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의 앞에 떡 버티고 선 가족연 하는 사회다. 원숭이 양파 까기도 아니고 가구 구성이 바뀌고, 가족에 대한 의무를 가볍게 한들 가족 바깥에 가족이 넘쳐나는 사회라니. 물론 그 ‘가족주의’의 허물도 언젠가는 고쳐지겠지만 그때까지 얼마나 더 많은 “딸 같아서” “○○가족”을 경험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 시간을 지혜롭게 견뎌 내려면 법적인 대응 말고도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재치 있는 대처법 한두 가지쯤은 익혀 두는 게 좋겠다. 예를 들면 어떤 이가 경험담이라며 SNS에 올린 이런 팁 같은 거다.

‘택시 타서 조용히 가고 싶었는데 기사 아저씨가 말이 많았다. 나보고 결혼 빨리 해야 된다 요즘 여자들이 이기적이라 애를 안 낳는다 어쩌고 하다가 “아가씨가 딸 같아서 하는 소리야” 이러길래 “아빠 같아서 그런데 용돈 좀 주세요” 아저씨가 이제야 조용해졌다.’ 마음 같아선 택시 요금 내지 말고 “아빠, 고마워” 하고 후닥닥 내리는 쪽을 권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싸움 나려나.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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