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끌기, 책임 회피 전략이 아닐까

고대영 KBS 사장이 10일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국정감사에 출석하면서 KBS 노조원이 질문을 하려 다가서자 한 쪽 팔로 저지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방송법 개정안을 처리하면 사퇴하겠습니다."

최근 고대영 KBS 사장이 흥미로운 발언을 했습니다. 방송 정상화와 경영진 퇴진을 주장하며 70일 가까이 장기 파업이 이어지고 있는 KBS 사태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난해 8월 취임하면서부터 끊임없이 사퇴 종용을 받아도 꿈쩍하지 않던 고 사장이 느닷없이 '방송법'을 운운하며 사퇴를 입에 올린 건 왜 일까요.

두 가지를 이유로 들고 싶습니다. 하나는 지난해 7월 더불어민주당에 의해 발의된 방송법 개정안이 1년 넘게 국회에서 계류 중인 상황입니다. 해를 넘기고 정권이 바뀌었지만 방송법 개정안 통과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강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방송법 개정안 처리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뜻인 거지요. 고 사장이 '시간 끌기' 작전에 나섰다고 보입니다. 내년 11월 23일까지 임기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시간을 벌어보자는 노림수가 엿보입니다.

만약 방송법 개정안이 국회 통과를 한다고 해도 시간은 고 사장 편입니다. 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방송법 개정안의 부칙을 보면 제1조(시행일) ‘공포 후 3개월이 경과한 날부터 시행’하며, 제3조(공사의 이사회, 집행기관의 구성에 관한 경과조치) ‘공사의 이사회 및 집행기관은 이 법 시행 후 3개월 이내에 이 법의 규정에 의하여 구성되어야 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KBS 양대 노조 중 하나인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새노조)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예산안 등이 통과된 뒤 12월 20일에 방송법이 통과됐다고 해도 부칙에 따라 내년 3월 20일에 법이 시행되면, 6월 20일이 되어야 이사회와 사장이 교체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까지 경영 공백을 우려하며 고 사장이 자리를 지키면 임기를 대부분 채우게 됩니다. 6월까지 사장을 교체하지 못한다고 해서 강제할 방법도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입니다.

더불어민주당의 방송법 개정안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KBS 이사회와 MBC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의 이사 수를 각각 13명(여권 몫 7명, 야권 몫 6명)으로 확대하자는 법안입니다. 현재 KBS 이사회는 여권 이사 7명과 야권 이사 4명 등 총 11명이며, MBC 방문진은 여권 이사 6명, 야권 이사 3명 등 총 9명으로 구성됐습니다. 여기에 재적 이사의 3분의 2이상(9명 이상)이 찬성해야만 사장을 선임하도록 하는 '특별다수제', 노사가 각각 동수(5명)로 추천한 인사로 구성된 '편성위원회' 설치 등이 담겨 있습니다.

지난달 2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새노조)의 노조원들이 ‘KBS·MBC 공동파업승리 결의대회’ 참석해 고대영 KBS사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서재훈기자

두 번째는 고 사장이 자신의 거취 문제를 정치권에 넘김으로써 정작 자신의 책임은 모면하려는 '책임 회피 전략'을 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정권에 유리한 보도로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자신에 대한 비판을 덮고 공영방송을 둘러싼 여러 논란을 정치 싸움으로 돌리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 사장은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보도총괄팀장(2008년 9월~12월)과 보도국장(2009년 1월~2010년 2월), 보도본부장(2011년 1월~2012년 1월), 사장(2016년 8월~현재)을 역임했습니다. 지난 9년간 KBS의 보도를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에서 뉴스를 진두지휘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KBS의 주요 요직에 있는 동안 보도의 공정성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됐고, 2009년 6월 KBS 기자협회에서 실시된 보도국장 신임 투표에서 투표자의 93.4%가 불신임한다는 입장을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사내에서조차 그것도 후배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선배였던 겁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유리한 '편파 보도'로 KBS의 공정성, 독립성을 잃은 모습에 KBS 기자들의 반발이 많았다 할 수 있습니다. 고 사장이 보도국장이던 시절 용산 참사 당시 강호순 사건 과잉 보도 의혹이 있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축소 보도 논란,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 특종 누락 논란, 정운찬 총리 후보자 논문 검증 축소 보도 논란 등도 있었습니다.

또한 보도본부장 시절에도 KBS1 '시사기획 10'의 윤도현 내레이터 배제지시 논란, 신재민 문체부 차관 수뢰 혐의 축소 보도, 이명박 대통령 내곡동 사저 부실 보도 의혹 등으로 재임 기간 내내 많은 논란과 비판을 자초했습니다.

국정원 금품수수 의혹까지 있습니다. 2009년 고 사장이 보도국장 시절 국정원 정보관(I/O)로부터 현금 200만원을 받았다는 정황이 포착된 것이죠. 당시 조선일보가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에 국정원이 개입했다는 보도가 났는데, 이를 비보도하는 조건이었다는 겁니다. 지난달 23일 국정원 개혁위원회(개혁위)는 이 국정원 담당자의 진술과 함께 예산신청서와 자금결산서 등 구체적인 문서까지 공개했습니다. 이어 20일에는 국정원 정보관이 국정원에 보고한 문건도 세상에 알려졌죠. 'KBS 보도국장 안보 현안 관련 보도협조'라는 제목의 문건에는 '안보 관련 KBS 기자 취재 분위기 파악', '남북관계ㆍ국익 저해 보도 자제' '국정운영 지원 보도' '소요예산: 200만원, 5월 8일 전달(여론2팀장, 담당 I/O)' 등의 내용이 담겼습니다. 이 국정원 정보관은 "고 사장과 월 1~2회 만났"고 "급할 경우 전화통화 한다"고까지 진술했습니다.

지난달 24일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새노조)가 국정원 개혁위원회가 폭로한 고대영 KBS 사장의 금품 수수 의혹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강은영 기자

차고 넘치는 고 사장의 논란 이력은 KBS 구성원들이 그의 퇴진에 더 목소리를 내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고 사장에게도 돌파구가 필요했을 겁니다. 고 사장은 10일 열린 KBS 국정감사에 출석해 '조건부 사퇴'에 대해 "정치적 격동기가 있을 때마다 KBS 사장이 비정상적 방법으로 임기를 끝내는 것을 제 선에서 끊고 싶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논란을 '정권의 언론장악'이라는 프레임에 가두고 이념싸움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방송법 개정안이 1년간 표류한 건 지난 박근혜 정부에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전신)의 반대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자유한국당 입장에선 최근 MBC 방문진이 재편(여권이사 5명, 야권이사 4명)되면서 경영진의 교체가 현실화 되자 급하게 선회한 형국입니다.

자유한국당 입장에서는 방송법이 통과하든 하지 않든 일단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법안이 통과되면 최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벌 수 있고, 통과되지 않더라도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지지부진한 싸움을 통해 고 사장의 임기를 채울 수 있는 상황입니다. 자신들이 집권하던 시절 임명한 사장을 당분간 지킬 수 있는 것이지요. 자유한국당의 행보는 이래저래 고 사장에게 유리하기만 합니다. 고 사장이 방송법 개정안 통과를 놓고 벌이는 '조건부 사퇴'의 '빅 피처'는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게 아닐까요?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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