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역대 최장의 추석 황금연휴를 마치고 첫 출근을 하는 직장인들이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길을 건너고 있다. 디지털 노마드들은 대도시의 복잡한 출근에서 벗어나 더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기를 원한다. 서재훈 기자.

디지털 노마드. 사무실을 벗어나 원격근무 등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단어다. 2007년 미국 작가 팀 페리스가 ‘4시간’이라는 책을 통해 ‘장소에 구애되지 않고 일하는 삶’을 소개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정보기술(IT) 발달과 유연근무정책의 도입으로 오늘날 디지털 노마드의 삶은 더 이상 미래의 일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2014년 전후로 ‘디지털 노마드’라 칭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과 ‘노마드’ 두 단어 자체에 ‘일’이라는 의미가 없어서일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노마드를 일과 상관없는 ‘자유로운 여행자’로 오해한다. 구글에 ‘디지털 노마드’를 검색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이미지도 노트북을 들고 해변에 앉아 유유자적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진짜 디지털 노마드들은 강조한다. “직업이 고려되지 않는 디지털 노마드는 배낭여행족과 다를 바가 없다.”

구글에서 '디지털 노마드'를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이미지는 해변에 앉아 노트북을 들고 유유자적하는 모습이다. 인터넷 캡쳐.
디지털 노마드는 ‘여행자’와 ‘프리랜서’라는 ‘흔한 오해’

“바닷가에 앉아서 노트북을 보면 일단 강한 햇살 때문에 모니터가 보이지 않아요. 모래바람 때문에 노트북이 망가질 수도 있어요.” 정혜수(24)씨는 “실제 디지털 노마드로 일해보지 않은 사람일수록 미디어에서 접한 화려한 이미지에 현혹된다”며 “2017년의 트렌드가 된 퇴사, 즉 기존 직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갈망 역시 디지털 노마드를 오해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정씨가 볼 때 디지털 노마드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여행도 이동도 아닌 일이다. 정씨와 조희정(33)씨가 프로젝트 팀 노마드씨를 만든 이유도 일의 효율성 때문이다. 두 사람이 오랜 직장 생활 끝에 느낀 것은 하루 두 시간 동안 지옥철을 타고 출퇴근 하며 길에 버리는 시간이 아깝다는 것이었다. 특히 모바일기기용 소프트웨어(앱)와 인터넷 콘텐츠를 제작하는 업무 특성상 공간에 구애 받지 않을수록 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결국 이들은 놀며 일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디지털 노마드가 되기로 했다. 그래서 정씨와 조씨는 대부분의 업무를 여행지가 아닌 집이나 협업공간에서 진행한다.

정혜수씨(왼쪽)가 인도네시아 발리의 협업공간 후붓(Hubud)에서 일하고 있다. 후붓에는 전 세계에서 온 디지털노마드들이 모여 일한다. 정혜수씨 제공.

이런 시간과 장소의 유연함은 흔히 프리랜서의 특권으로 꼽힌다. 하지만 직장인들 역시 원격근무를 통해 디지털 노마드로 살아갈 수 있다. 오히려 수익이 불안정한 프리랜서보다 더 현실성이 높다.

개발자 김태곤(37)씨는 지난 6년간 디지털노마드로 산 직장인이다. 그는 2011년 미국 뉴욕의 한 스타트업으로 이직하며 처음 원격근무를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뉴욕 본사로 가서 일을 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약 4년간 원격근무를 계속했다. 그동안 원하는 시간에 집중할 수 있는 원격근무의 장점을 맛본 그는 지난해 6월 400여명의 직원이 모두 원격근무를 하는 회사인 오토매틱으로 이직했다.

오토매틱은 오픈소스 블로그 소프트웨어인 ‘워드프레스’ 개발업체로 2005년 창립 이후 지금까지 전 직원이 원격근무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창립자 겸 최고경영자(CEO)인 매트 뮬렌웨그의 ‘장소에 상관없이 전 세계 인재를 끌어 모으자’는 경영철학이 바탕이 됐다. 김씨는 업무용 메신저 ‘슬랙’과 화상회의 프로그램 ‘줌’ 등을 활용해 1,2주마다 미국ㆍ캐나다ㆍ불가리아 등지의 팀원과 화상회의를 한다. 회사는 성과만 내면 직원이 언제 어디서 일하든 상관하지 않으며 자율휴가제를 통해 직원의 휴식을 존중한다.

김씨는 “여행은 디지털 노마드의 필수 요소가 아니다”라며 “실제 디지털 노마드는 업무 과정에서 자기통제 및 외로움의 문제를 끊임없이 마주한다”고 설명했다. “원격근무는 명확한 출퇴근이 없다 보니 일과 개인생활을 구분이 안돼 너무 많이 또는 너무 적게 일하는 어려움을 겪곤 합니다. 또 동료들과 주로 문자로 대화해 사람과 소통하는 느낌이 덜하죠.” 따라서 그는 “자기관리가 잘 되고 외로움을 덜 타는 성격일 수록 이 같은 업무방식에 더 적합하다”고 조언했다.

지난해 6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오토매틱' 사의 '워드캠프 유럽' 컨퍼런스. 전세계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한 이 행사에 김태곤씨는 회사 지원을 받아 자원봉사자로 참가했다. 다른 나라에 살지만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만나기도 했다. 김태곤씨 제공.
결국 남의 나라 얘기일 뿐일까?

디지털 노마드에 대한 다큐멘터리 ‘원웨이티켓’을 제작한 도유진(29) 감독은 “원격근무를 통해 일하는 방식이 전세계적 흐름”이라고 말했다. 오토매틱과 같은 글로벌 IT기업은 물론 아마존, 제너럴 일렉트릭(GE) 등 다양한 기업들이 업무 효율성을 위해 원격근무를 활용한 유연근무제를 도입하고 있다. 도요타, 미쓰이물산 등 일본 대기업들도 발빠르게 자사에 맞는 유연근무방식을 도입 중이다.

그럼에도 의문이 남는다. 한국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 아닐까. 도 감독은 “주 6일 근무를 하던 과거에 주 5일 근무가 굉장한 일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누구에게나 당연해졌다”며 “원격근무를 통한 디지털 노마드의 삶 역시 점차 익숙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람들이 개인의 자율과 행복을 추구하면서 여기 맞춰 근무환경을 바꿔나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기업들의 경직된 업무방식은 유명하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16년 일ㆍ가정 양립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기업 1,000곳 중 219곳(21.9%)만 유연근무제를 도입했 다. 이는 재택근무, 시간제근로 등 관련 방식을 하나라도 도입했다고 응답한 기업의 총합이다. 2014년 기준 일본 기업의 52.8%는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운용하고, 미국 기업의 28%가 재택근무를 도입한 것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정재우 한국노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유연근무제 도입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 “여전히 많은 고용주가 이를 관리비용이나 부작용이 많은 제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도 감독도 “야근 등 보여주기식 조직문화가 강한 것도 원인”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어렵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디자인 컨설팅업체 슬로워크는 3년 전부터 원격 근무를 도입했다. 구성원 개개인이 가장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이었다. 현재 직원 50여명 중 30~40%가 원격근무를 선택하고 있다. 이 업체의 김연주 이사는 “경영진 입장에서 원격근무를 시행하고 직원 자율성에 맡겼다가 회사가 위험에 빠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생길 수 있다”며 “그러나 서로 업무방식을 조율하는 적응 기간을 거친 뒤 원격근무를 해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했고 직원들의 업무 집중도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도유진 감독의 다큐멘터리 ‘원웨이티켓’의 예고편. 작품은 11월 말 공개된다]

더 나은 ‘먹고사니즘’을 위한 방법

디지털 노마드라는 화려한 단어가 가린 한가지 핵심요소가 있다. 바로 가족이다. 인터뷰에 응한 한국의 디지털 노마드들은 유연 근로를 통해 얻게 된 행복 중 하나로 가족과 개선된 관계를 꼽았다. 김태곤씨는 “원격근무를 시작한 이후 아내와 함께 식사준비를 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으며 아내도 삶의 만족도가 더 높아졌다며 좋아한다”고 말했다. 조희정씨 역시 “부모님과 동생의 삶에 더 관심을 갖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늦은 밤까지 사무실을 지키던 시절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다.

김 이사는 “원격 근무가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본인 여가를 즐기는데 좋다면, 가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가족에게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특히 여성 경력단절을 막는데도 중요하다. 일ㆍ가정 양립은 정부가 기업들에게 유연근무제 도입을 장려하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디지털 노마드는 결코 소수가 누리는 특별한 삶의 방식이 아니다. 더 효율적으로, 행복하게 일하기 위한 새로운 ‘먹고사니즘’, 그리고 그것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도 감독은 “우리보다 먼저 디지털 노마드가 소개된 서구에서는 화려한 모습만 보고 별다른 직업능력 없이 여행만 추구하는 청년들이 등장해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며 “우리나라에는 이제 막 키워드가 도입된 만큼 이를 새로운 노동패러다임으로 받아들였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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