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대니얼 키스의 심리학적 SF

#1
24개 인격 가진 실존인물 책으로
다중인격 대중적으로 알린 고전
최근엔 뇌파 등 객관적 증거 늘어
#2
인간의 정신과 심리에 관심집중
따듯한 시선으로 정신장애 조명
장애인 대하는 편견에 문제제기
나를 나라고 여기는 정체성은 사람이 세상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출발점이다. 그 정체성의 혼돈과 전도를, 작가 대니얼 키스는 소설과 논픽션으로 깊이 조명했다. 사진은 다중인격을 소재로 한 스릴러 영화 ‘아이덴티티’(2003) 포스터. 콜럼비아 트라이스타 제공

1977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빌리 밀리건이라는 이름의 한 청년이 강간 및 납치, 강도사건으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같은 곳에서 세 번이나 범죄를 저질렀고 체포 당시에는 어린애처럼 “내가 뭔가 잘못했다면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다. 피해자는 범인이 계속 성격이 변하거나 기억을 잃는 것을 목격했다. 재판 당시에는 밀리건에게 10명의 인격이 있다고 알려졌지만, 정밀검사 결과 그에게는 무려 24개의 인격이 있었다.

최초로 법정에서 인정받은 다중인격

빌리 밀리건은 법정에서 다중인격으로 무죄를 선고받은 최초의 사람이다. 밀리건은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며 다중인격 논쟁에 불을 지폈다. 바로 전 해에 드라마로 제작된 16개의 인격이 있는 시빌이라는 여성의 사례도 화제를 낳고 있었지만, 시빌은 밀리건처럼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고, 지금도 그 신빙성에 의문이 있는 편이다.

미국 법정에서 다중인격장애가 인정돼 최초로 무죄 판결을 받은 빌리 밀리건. Blake23 촬영. 위키미디어

다중인격의 진단 자체는 오래되었지만 증상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근원적으로는 진단이 어렵기 때문이다. 성격 변화는 보통의 인간에게도 흔히 일어나고, 정말 인격이 여럿인지, 아니면 사기꾼이 탁월한 연기를 하는 것인지 혹은 기억상실이나 혼란증세인지 판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문화권에서 ‘빙의’나 ‘귀신들림’으로 해석하여 진단 자체가 되지 않기도 한다. 다중인격이 무죄사유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여전히 해석이 분분하다.

하지만 밀리건은 다중인격에 가장 회의적인 의사조차도 증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중퇴 학력의 밀리건에게 무려 24명분의 지식과 능력이 있었고, 이는 연기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의학도가 있는가 하면 가라데 고수, 탈출 전문가도 있었다. 각 인격마다 성별, 나이, 성격, 구사할 수 있는 언어, 지식, 지능, 말투, 체력수준까지도 달랐다. 본 인격인 빌리 밀리건은 열여섯 살에 자살시도를 한 시점에서 한 번도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깨어나면 자살을 시도하리라 생각한 다른 인격들은 ‘형제자매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그를 깨우지 않고 있었다.

인천 초등생 살해범 김모양은 다중인격을 주장했으나 법정 최고형인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해 다중인격을 내세우는 범죄자들이 있지만 법정에서 인정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다중인격자의 존재를 알리다

이미 인간의 뇌와 정신장애에 대한 심도 깊은 소설 ‘앨저넌에게 꽃을’을 쓴 바 있는 작가 대니얼 키스가 빌리 밀리건에게 관심을 두었다. 그는 2년간 그의 옆에서 지내며 논픽션을 쓰기 시작했다.

밀리건은 지속적으로 시간을 잃어버리고 살았기 때문에 그의 인생을 조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키스는 밀리건을 수백 번 만나 대화하는 것은 물론, 주변인물 62명을 인터뷰했고, 대금지불서, 영수증, 보험증서, 치료기록과 문서를 이용해 사건을 배열했다. 그럼에도 밀리건이 대화 도중 계속 기억을 잃는 바람에 거의 포기할 뻔했다가, 인터뷰 도중 전 인격이 융합된 새로운 인격이 나타나주는 바람에 겨우 집필을 완성할 수 있었다.

24명의 인격을 그려낸다는 전대미문의 과제가 걱정되었던 키스는 우선 다섯 개의 인격을 가진 다중인격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인 ‘다섯 번째의 샐리(1980)’를 집필했다. 같은 해에 다중인격은 비로소 미 정신의학회 정신질환 진단 기준인 DSM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다음해에 키스는 논픽션 ‘빌리 밀리건(1981)’을 출간했다. 키스는 24명의 인격이 가족처럼 한 몸을 공유하며 사는 이야기를, 정확하고 섬세한 자료조사와 탁월한 심리학적 분석, 소설적인 재미까지 완벽한 작품으로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아동학대의 희생자들에게 바친다’는 서문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흥미본위에 머무르지 않고, 다중인격이 생겨나는 불행한 배경과 그 이해와 치료법에 집중한다. 이 논픽션은 세계에 다중인격을 대중화시키며 현대 심리학의 고전이 되었다.

DSM에 증상이 등재되고, 다른 다중인격자인 시빌의 책과 드라마도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 내에서 75건에 불과했던 다중인격 진단 환자 수는 4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후 과잉진단을 줄이고 지침이 명확해진 뒤에야 다시 환자 수는 정상 수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도 증상 자체를 의심하는 의견은 있는 편이지만, 현재는 양전자단층촬영(PET), 자기공명영상(MRI) 등의 발달로, 인격이 변할 때 뇌파 패턴과 생리학적인 현상마저 달라진다는 점이 확인되어 다중인격의 증거가 되고 있다.

뮤지컬 ‘미스터 마우스’는 정신지체였다가 임상실험을 통해 천재적 지능을 얻지만 다시 퇴행하고 만다는 이야기다. 지능과 행복의 관계를 묻는 대니얼 키스의 ‘앨저넌에게 꽃을’을 원작으로 삼았다. 쇼노트 제공
바보와 천재가 보는 세상과 나

‘앨저넌에게 꽃을(1966)’은 대니얼 키스의 대표작이자 영미문학의 고전이다. 이 작품에서 키스는 정신지체인 사람이 뇌수술로 천재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키스는 작가가 되고자 했지만 의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와 충돌하면서 ‘교육을 통하지 않고 인공적으로 지능을 늘릴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하는 문제를 계속 고민했다고 한다. 키스가 기본적인 읽고 쓰기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위해 특수 영어반 수업을 하던 중 소설의 아이디어는 더욱 구체화되었다. 한 학생이 그에게 “열심히 해서 똑똑해지면 나도 이 일반 수업을 받을 수 있나요? 난 똑똑해지고 싶어요”하고 애원했다. 다른 반의 한 학생은 특수반에서 눈에 띄게 진전을 보였지만, 일반 학교로 돌아가자마자 배운 것을 전부 잃고 말았다.

소설은 뇌실험에 응한 찰리의 1인칭 시점의 경과보고서로 진행된다. 찰리는 IQ 70에서 보통의 인간으로, 다시 IQ 185의 천재에 이르렀다가 다시 천천히 퇴화하여 본래대로 돌아간다. 소설의 서술은 어린애의 오타투성이 문장에서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는 전문가의 언어로 한 단계씩 변해간다. 지능이 변하면서 찰리가 보는 세상의 풍경도 변하고, 과거의 체험도 모두 다르게 해석되며, 가족과 주변사람들의 태도도 모두 변해간다. 천재가 되는 것은 즐거운 일만은 아니고, 이를 잃어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즐거운 일이 아니다. 앨저넌은 찰리보다 먼저 실험에 성공한 생쥐로, 찰리가 처지에 공감하며 마음을 나누는 상대다.

뇌수술의 실험대상이 돼 똑똑해진 쥐는 세상을, 인간을 어떻게 보게 될까? 뮤지컬 ‘미스터 마우스’의 공연 장면. 쇼노트 제공

이 소설은 인간의 정신과 심리, 장애에 대한 심도 깊은 사유와 따듯한 이해를 보여준다. 소설 내에서 찰리가 천재가 된 뒤에, 예전의 자신과 ‘다른 인격이 되었다’고 느끼고, 본래의 인격에게 몸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전개는 키스가 관심을 두고 연구한 다중인격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앨저넌에게 꽃을’은 미 전역에 장애인, 특히 정신 장애인을 사회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전 세계에도 유사한 반향을 일으키며 30개국에서 출판되었고 세계 각국에서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등으로 각색되었다. 1968년 영화 ‘찰리’로 상영되어 주연 클리프 로버트슨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국내에도 ‘생쥐에게 꽃다발을’, ‘빵가게 찰리의 행복하고도 슬픈 날들’, ‘찰리’, ‘모래시계’ 등 다양한 이름으로 여러 번 재출간되었다. 2006년 KBS 드라마 ‘안녕하세요 하느님’으로 각색 방영되었고, 2006년 초연에 이어 올해 ‘미스터 마우스’라는 이름으로 뮤지컬로도 상영되었다.

상상과 현실의 느슨한 경계

‘앨저넌에게 꽃을’을 집필한 지 40년이 지난 1999년, 키스는 ‘앨저넌, 찰리, 나: 작가의 여정’이라는 회고록을 완성했다. 완성을 축하할 겸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던 키스는 신문을 읽다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프린스턴대의 신경생리학자 조 치엔 박사가 이끈 연구팀이 쥐의 유전자를 조작해 지능을 높이는 데에 성공했다는 기사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키스는 치엔 박사에게 연락해 그 기술이 인간에게 적용되는 데에 얼마나 걸릴지 물어보았다. 박사는 고민하다가 ‘30년 정도 예상한다’고 답했다. 연구팀은 기본적으로 이 연구는 치매나 기억상실 환자를 돕는 방향이어야 하며, 보통의 인간의 지능을 높이는 방향의 연구는 훨씬 더 많은 지침과 고민과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실제로 쥐를 대상으로 지능을 높이는 연구는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 후 16년이 지난 2015년, 영국 리즈대 생명과학 연구팀에서는 쥐의 뇌에서 분비되는 PDE4B 효소를 억제하자 쥐의 지능이 높아지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 약은 지금 임상시험을 위해 우선 동물용으로 개발 중이며, 연구팀은 치매, 정신지체의 새 치료법이 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김보영ㆍSF 작가

대니얼 키스

1927년 8월 9일 ~ 2014년 6월 15일. 17세에 미 해병대에 들어가 선박생활을 했다. 브루클린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동 대학원에서 영미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하이오주립대 문예작문 교수로 재직했다. 다중인격장애에 관심을 두고 옆에서 관찰하며 연구했다. 인간의 심리와 이상심리를 따듯한 시선으로 깊이 파헤친 작품을 주로 썼다. ‘앨저넌에게 꽃을’은 그의 대표작이자 장기 베스트셀러이며, 논픽션 ‘빌리 밀리건’은 현대 심리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2000년 전미SF판타지작가협회(SFWA)에서 명예공로상을 받았다.

<소개된 책>
빌리 밀리건

대니얼 키스 지음

박현주 옮김

황금부엉이 발행

앨저넌에게 꽃을

대니얼 키스 지음

구자언 옮김

황금부엉이 발행

인기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제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