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샘 사건 보고 용기 냈다” 공론화 잇달아

게티이미지뱅크

#중소기업에 다니는 A(26)씨는 최근 친구들이 있는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 올해 초 있었던 일을 뒤늦게 털어놨다. 60대인 회사 대표로부터 당했던 ‘스폰(경제적 지원을 빌미로 욕구를 채우는 스폰서) 제의’다. 대표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가불 형태로 회사에서 돈을 빌린 A씨를 따로 불러 “키스해달라” “인생 얼마든지 편해질 수 있다” 등 충격적인 말을 쏟아냈다. A씨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지만, 이후로도 계속 대표를 마주칠 수밖에 없어 결국 정신과 상담까지 받아야 했다. A씨는 “수치심에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다가, 한샘 사건 이후에야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B(25)씨는 주말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직장 내 성폭력의 심각성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한샘 사건 봤어?”로 시작한 대화는 어느새 자신이 겪은 일의 부당함을 성토하는 자리가 됐다. “팀장이 격려한다는 핑계로 자꾸 어깨나 등 뒤 속옷 끈 위에 손을 올려 기분이 나쁘다”는 류의 경험은 흔한 편. “신입 시절 남자 선배 한 명이 ‘늦었으니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해 도망쳤다”는 친구부터, “아이가 둘인 과장님이 주말에 바다를 보러 가자고 해 너무 무서웠다”는 친구까지 있었다. B씨는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조심하자’고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속상했다”고 했다.

가구업체 한샘 신입 사원 성폭력 논란이 공론화하면서 많은 여성들이 그간 사회생활을 하며 속으로만 삭혔던 피해 경험들을 밖으로 내보이고 있다. ‘한샘 사건을 보고 용기를 냈다’며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성폭행 피해 주장을 올린 현대카드 직원이 대표적이다. 9일에는 전직 기자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언론계 성추행 피해를 폭로하는 등 하루가 멀다 하고 트라우마로 남은 아픈 과거를 털어놓고 있다. 최근 미국 영화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추문이 발단이 된 ‘미투(Me Too)’ 운동과 비슷한 현상이 국내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팝스타 레이디 가가도 지난달 ‘미투 운동’에 동참했다. 트위터 캡처

미투 운동은 ‘나도 당했다’는 의미로, 자신의 성폭력 피해경험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공유하면서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사회적 흐름이다. 외국에선 유명인이 실명으로 가세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면, 국내에선 여성끼리 모인 자리에서 고통을 털어놓는 단계를 넘어 익명이지만 SNS를 통로 삼아 피해 사연을 속속 알리고 있다.

한 네티즌은 6일 트위터에 10여년 전 당할 뻔 했던 직장 내 성폭행 사건을 털어놨다. 그는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한샘과 현대카드 피해자 사례를 결코 남 일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고 했다. 다른 네티즌은 4일 트위터에 지난해 직장 내 성추행 사건을 신고했을 때, 상사가 “연봉을 더 받으려는 속셈으로 일을 키운다”고 쏘아붙였다는 내용을 공유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SNS나 인터넷 게시판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면서도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피해 사실을 한번에 알릴 수 있어 성폭력 피해자의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낮다”고 설명했다.

피해여성의 폭로가 이어진다면 한샘 사건이 제2의 ‘강남역 살인’ 사건처럼 인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김미순 전국성폭력상담소연합회 대표는 “강남역 사건이 번화가에서도 누구나 무서운 일을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불러 일으켰다면, 이번 한샘 사건은 직장생활 속 성폭력 위험에 누구나 노출돼 있다는 공포를 일으킨다”고 분석했다. 송재룡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공론화를 통해 남성이 의도하건, 하지 않건 본인이 무심하게 하는 행동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관련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회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