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블랙리스트 탓에 고생... “이제라도 밝혀져 너무 다행”

김형석 작곡가는 "아이랑 놀다 보면 어른이 아이가 되지 않느냐"라며 "요즘 창작의 영감을 육아에서 얻는다"며 웃었다. 최지이 인턴기자

작곡가 김형석(51)은 지난해 3월 MBC 음악 예능프로그램 ‘복면가왕’에서 돌연 사라졌다. 당시 알려졌던 하차 이유는 그의 스케줄 문제였다. 2015년 4월 첫 방송부터 출연하며 열의를 보였던 그의 갑작스러운 하차를 두고 방송가에는 외압이란 말이 돌았지만, 소문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1년 6개월 뒤 그의 석연치 않았던 프로그램 하차 배경이 드러났다. 국가정보원(국정원) 개혁발전위(TF)가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이 방송사를 상대로 좌파 예술인의 퇴출 운동을 벌였다고 지난 9월 자료를 내 시인한 뒤다. 국정원 발표 직후 전국언론노조 MBC본부의 최행호 PD는 “김형석이 경영진의 요구로 ‘복면가왕’에서 하차했다”며 박근혜 정부로까지 이어진 정치적 외압을 폭로했다. 김형석은 2012년과 올해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바 있다.

“나중에 (‘복면가왕’) PD랑 통화했는데 (마음이) 복잡하더라고요.” 최근 서울 강남구 키위미디어그룹 사옥에서 만난 김형석은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고 치졸한 탄압”이라며 “그런 제재들이 이제라도 밝혀져 너무 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자신이 운영하는 연예기획사에 불똥이 튈까 노심초사했다. 김형석은 “보이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게(제재) 가장 큰 공포니까”라고 했다. 그의 바람은 “제재를 하더라도 당당하게 이유를 밝힐 수 있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이효리 앨범 제작, ‘범죄도시’ 배급... 작곡가의 도전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자 그의 삶에도 볕이 들었다. 김형석은 올 상반기 이효리의 앨범 ‘블랙’ 제작을 총괄해 가요계에서 화제를 모았고, 하반기엔 644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 중인 ‘범죄도시’를 배급해 주목 받았다. 마동석 주연의 ‘범죄도시’는 김윤석ㆍ이병헌을 앞세운 ‘남한산성’에 밀려 힘을 쓰지 못할 것이란 예상을 뒤집고 청소년관람불가 등급 영화 중 ‘내부자들’(2015)과 ‘친구’(2001)에 이어 역대 흥행 3위까지 치고 오르는 이변을 연출했다. 김형석은 “처음으로 영화에 투자해 만든 작품이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내 놀랐다”며 웃었다. 김형석은 ‘범죄도시’를 발판 삼아 ‘기억의 밤’을 오는 29일 내놓은 뒤 내년 ‘도살’을 선보이기 위해 기획 작업에 한창이다. 김형석은 사극 ‘다모’로 유명한 정형수 작가와 친분을 바탕으로 “드라마 제작도 논의 중”이다.

김형석은 1989년 인순이에게 준 ‘이별 연습’을 시작으로 김광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 신승훈의 ‘아이 빌리브’, 박진영 ‘너의 뒤에서’ 등 숱한 히트곡을 내며 30여 년 동안 작곡가로 살았다. 김형석이 음반 제작을 넘어 영화와 공연 시장까지 발을 넓힌 데는 “영화 제작자인 장원석 PD와 박칼린 음악감독 등의 도움”이 컸다. 김형석은 중국 상하이에 실용 음악 아카데미 ‘동방 상하이 스타 아카데미’도 세웠다. 금한령(禁韓令ㆍ한류 금지령)으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지만, 최근 한중 양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갈등을 봉합하기로 한 공동합의문을 발표한 것에 기대를 걸고 있다. 김형석은 중국 진출에 대해 “지금은 씨를 뿌린다는 생각으로 미래를 보고 한 일”이라고 했다.

트럼프 美 대통령 방한 때 울려퍼진 ‘미스터 프레지던트’

김형석이 쓴 노래는 1,200여 곡에 달한다. 그는 1990년대 인기를 누렸던 보컬 그룹 솔리드와의 만남을 가장 기억에 남는 반전으로 꼽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친구들이라며 누가 좀 봐달라고 하는 거예요. 헐렁한 옷차림에 기대도 안 했는데, (김)조한이 노래 시작한 뒤 일어서서 들었어요. 보이즈투맨 같았거든요.” 김형석은 “작곡이 내 본업”이라고 했다. 최근엔 Mnet 음악프로그램 ‘더 마스터-음악의 공전’에서 소프라노 임선혜가 부를 클래식 편곡에 진땀을 빼고 있다.

지난 7일 청와대에선 그가 작곡한 ‘미스터 프레지던트’가 울려 퍼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연 환영식장에서 양국 정상이 퇴장할 때였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상징하는 음악이 없다는 게 작곡가로서 안타까웠어요. 대통령이 어떤 분이든 공식 행사에서 당당하고 믿음을 보여 줄 수 있는 의전곡을 만들고 싶었어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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